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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의 '앵프라맹스inframince'

yellowday 2017. 11. 19. 18:03
앵프라맹스 inframince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고 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그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인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 자신이 꾸며낸 말이지요.

프랑스말의 '앵프라infra'는 영어의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라고 할 때의 '인프라infra'와 같은 말로 '기반'이나 '하부'를 뜻하는 
접두어입니다. 그리고 '맹스mince'는 '얇은 것, 마른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적외선을 '앵프라루즈infrarouge'라고 하듯이 
앵프라맹스라고 하면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초박형의 상태'를 뜻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뒤샹 자신은 그 말을 실사가 아니라 형용사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구체적인 상태라고 하기보다는 작용이나 효과를 
나타내는 말로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섬세한 어떤 작용을 뜻하는 암호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비로드 천이 서로 스칠 때 나는 미묘한 소리 같은 것을 그는 앵프라맹스라고 불렀습니다. 
시인 김광균의 「설야」에서 '먼 곳에 여인이 옷벗는 소리'와 같은 것이 한국적인 앵프라맹스의 정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뒤샹은 그의 노트에서 앵프라맹스를 설명하지 않고 64가지 시적 이미지를 통해서 그 개념을 암시하려고 했습니다. 
그 중 알기 쉬운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비로드의 바지 : (걷고 있을 때) 바지 가랑이가 스치면서 나는 휘파람 같은 소리는 소리에 의해 표현되는 앵프라맹스의 분리이다.(청각적)
- 담배 연기가 그것을 내뿜은 입과 똑같은 냄새를 지닐 때 두 냄새는 앵프라맹스에 의해서 맺어진다. (후각적)
- (사람이 막 일어선) 의자에 앉을 때의 미지근한 체온이 깔려 있는 것은 앵프라맹스이다.
- 앵프라맹스의 애무. (촉각적)

사람들은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합니다. 나는 타자와 늘 하나가 되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고 끌어안습니다. 
그럴수록 어쩔 수 없이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틈새를 발견하고 안타까워하지요. 애타는 절망이 또다시 남에게 다가서려는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부르고 정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움이라고도 합니다. 보이고 잡히는데도 아주 얇은 
앵프라맹스가 그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찢을 수도 녹일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어령,『지성에서 영성으로』 p.157-159 (열림원)  출처:전용준님의 싸이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