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가(赤壁歌)>는 중국 소설인 『삼국지연의』을 저본으로 하여 성립된 작품이다. 『삼국지연의』에는 조조를 간웅(奸雄)이라 하여 부정적인 인물로, 유비·제갈공명·관우·장비·조자룡 등을 어질고 용맹스러운 긍정적인 인물로 인식하는 작자의 시각이 드러난다. 이러한 시각은 적벽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은 『교방가요(敎坊歌謠)』에 ‘화용도, 이것은 지혜로운 장수를 칭송하고, 간웅을 징계한 것이다(華容道 此勸智將 而懲奸雄也).’라는 기록을 남겼다.
적벽가는 판소리의 연행 원리가 어느 정도 확립된 이후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판소리 장르 자체가 정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 소설이 판소리화 되어 불렸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춘향가(春香歌)>와 같은 판소리가 형성된 17~18세기의 어느 시점에 적벽가의 초기 형태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성립 당시의 적벽가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에 기반한 <조조패주> 대목이 중심이 되는 소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적벽가와 관련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록인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戲)」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송만재는 적벽가에 대한 감상을 바탕으로 ‘궂은 비에 화용도로 도망친 조조(秋雨華容走阿瞞) 관운장은 칼을 쥐고 말에서 보는데(髥公一馬把刀看) 군졸 앞서 비는 꼴 정녕 여우 같으니(軍前搖尾眞狐媚) 우습구나, 간웅의 모골이 오싹(可笑奸雄骨欲寒).’이라는 관극시를 남겼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장면을 묘사한 시인데, 송만재가 이 부분을 택한 것은 당시의 적벽가 가운데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양반 및 중인층이 주요한 판소리 향유층으로 등장하는 19세기에 이르러 적벽가는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특히 양반층의 애호를 많이 받았으며, 가객이나 중인층의 연희 공간에서도 즐겨 불렸다. 천하를 다투는 남성 영웅들의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양반층의 관심사와 부합했으며, 남성적이고 장중한 소리 대목이 비교적 많은 점도 그들의 미의식에 어울렸다. 적벽가의 인기가 높았던 만큼, 19세기 전반에 이름을 날렸던 송흥록·모흥갑·방만춘·주덕기 등 다수의 명창들도 적벽가에 능했다.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 적벽가를 장기로 삼았다고 소개된 명창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동편제 내지는 중고제에 속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동편제는 씩씩한 창법과 웅장한 우조를 위주로 하되 별다른 기교 없이 대마디대장단으로 소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음악적 특성이 적벽가의 가창에 어울렸기 때문에, 동편제에 속하는 명창들이 적벽가를 특히 즐겨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이후 적벽가에는 긍정적 영웅들의 형상이 강화되고 조조는 골계적인 인물로 격하되는 변모가 나타났으며, <새타령>, <군사설움타령> 등 음악적으로 수준 높은 소리 대목들이 더늠으로 첨가되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적벽가의 전승은 다소 위축되기 시작했다. 조선 사회에서는 적벽가가 양반 식자층(識者層)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지만, 신분제가 점차 해체되면서 주요 판소리 향유층의 구성이나 취향에도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이에 적벽가보다 춘향가, <심청가(沈淸歌)> 등이 더 인기 있는 소리가 되었다. 여성 판소리 창자들 다수가 이 시기에 등장한 것도 적벽가의 전승에 영향을 미쳤다.
적벽가는 여성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며, 어지간한 공력 없이는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이른바 ‘센 소리’에 속했기 때문이다. 서정성이 강한 <군사설움타령>의 경우는 여성 창자들이 종종 부르기도 했으나, 적벽가 전체를 완창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한편 20세기에 들어 웅장하고 호탕하면서도 고졸한 동편제의 창법보다 애련하고 처절한 계면조를 위주로 한 서편제의 창법이 더 인기를 얻게 된 상황도 적벽가 전승의 위축과 관련이 있다. 적벽가는 꿋꿋한 우조 위주의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소리의 전승 환경이 이처럼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도 적벽가는 창극으로 공연되기도 하고, 무대에서 토막소리로 불리기도 하며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적벽가의 대표적인 눈대목으로, <삼고초려(三顧草廬)>, <군사설움타령>, <조자룡 활 쏘는 대목>, <적벽화전(赤壁火戰)>, <새타령>, <군사점고(軍士點考)> 대목 등이 있다. 적벽가의 중요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에는 박동진(朴東鎭), 박봉술(朴奉述), 한승호(韓承鎬), 송순섭(宋順燮) 등이 있다.
내용
박봉술, 송순섭, 김일구 등에게 전수된 송만갑바디 적벽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유비, 장비, 관우가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제갈공명을 찾아간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낮잠을 자면서 일행을 기다리게 하고, 이에 성격이 불같은 장비는 초당에 불을 지르려고 달려든다. 유비는 장비를 진정시킨 후, 공명에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밝힌다. 공명은 처음에 거절하는 의사를 밝히나, 유비의 진심어린 설득 끝에 그의 책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한편 조조는 하후돈과 조인의 패배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직접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유비는 조조의 대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조자룡에게는 자신의 가솔을, 장비에게는 백성들을 부탁한다. 장비는 백성들을 무사히 피신시키고, 장판교대전(長坂橋大戰)을 승리로 이끈다. 오나라에서는 공명의 높은 이름을 듣고 노숙을 보내 그를 회유하고, 이를 예상하고 있던 공명은 유비를 안심시킨 뒤 떠난다.
이때 조조는 장강에 진을 치고 미리 승리를 기뻐하면서 자축하는 잔치를 벌인다. 전쟁에 끌려나온 병사들은 술에 취해 각자의 억울한 사연과 심정을 토로하고, 어떤 군사는 설움을 늘어놓는 다른 군사들을 꾸짖으며 전쟁에 나선 남아로서의 포부를 밝힌다. 이때 까마귀 한 마리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한 장수가 불길조(不吉鳥)라고 예측하자, 조조는 그를 죽인다.
한편 주유는 화공(火攻)을 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남풍이 필요한데, 별다른 방법이 없어 고민에 빠지고 결국 병을 얻는다. 이때 노숙과 함께 주유를 찾아온 공명은 자신에게 동남풍을 불게 할 계책이 있다고 말한 뒤, 남병산에 올라가 칠성단을 쌓고 제를 지낸다. 동남풍이 불어오는 것을 확인한 공명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조자룡을 따라 자리를 뜬다. 주유는 공명의 계책을 의심했지만, 정말 동남풍이 부는 것을 보고 그제야 공명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감지한다. 위협을 느낀 주유는 서성과 정봉에게 공명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지만, 뒤따라오던 두 장수는 조자룡의 활솜씨에 놀라 달아난다. 주유는 우선 조조부터 치기로 하고, 서둘러 출정한다.
돌아온 공명은 조조의 패주를 예상하고 그 퇴로까지 막고자 한다. 장비는 오림산 좁은 길에 매복하기로 하고, 관우는 만약 조조를 잡아오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는 군령장을 올린 뒤 화용도로 간다. 이때 조조 진영 앞에 황개 장군의 화선이 도착하고, 조조의 책사 정욱은 만약 황개가 양초를 싣고 온다면 선체가 묵직할 텐데 둥덩실 떠서 오므로 수상하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이미 황개 장군의 신호로 화공이 시작되고, 조조의 백만 대군은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만다.
주유 군사에 크게 패하고 정욱과 함께 도망가던 조조는 작은 메추리에도 놀라 방정을 떤다. 적벽강에서 죽은 군사들의 원혼은 새가 되어 울고, 조조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실없이 웃는다. 조조의 웃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자룡이 나타나고, 그는 서둘러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호로곡으로 도주한다. 조조가 가는 길에 또다시 실없이 웃자, 정욱은 조조가 웃으면 꼭 복병이 나타난다며 걱정한다. 정말로 그곳에 매복해 있던 장비가 나타나 호령하자, 조조는 갑옷까지 벗어던지고 군사들에 섞여 도망한다.
정욱이 복병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큰 길로 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조조는 듣지 않는다. 화용도로 들어가던 조조는 장승을 장비로 착각하고, 장승이 감히 자신을 속였다며 군법(軍法)으로 잡아들이라 명한다. 그러자 장승은 잠깐 졸던 조조의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놀라서 잠이 깬 조조는 장승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세울 것을 명한다. 조조는 술에 취해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공명 등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다가, 정욱에게 군사점고를 시킨다. 그러자 겨우 살아남은 허무적이, 골래종이, 전동다리, 구먹쇠 등이 차례로 등장해 조조를 비판한다.
화용도에 들어선 조조는 또 방정맞게 웃고, 그러자 잠복해 있던 관우와 그의 군사들이 나타난다. 조조는 정욱의 제안을 받아들여 관우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관우는 조조와 그의 군졸들을 놓아주고, 본국으로 돌아가 공명에게 이 일을 알린다. 그러자 공명은 조조는 죽일 사람이 아니므로, 이전에 조조의 은혜를 입었던 관우를 그곳에 보낸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적벽가의 전반부는 비장미가, 후반부는 골계미가 우세하다. 특히 결말에 이르러, 간웅(奸雄) 조조가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조조를 놓아준 관우가 의로운 영웅으로 칭송되는 축제 분위기까지 연출된다. 적벽가에서는 악인형 인물로 분류되는 조조마저 결국 용서를 받고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일조한다. 적벽가의 주제는 충과 의에 대한 강조, 조조로 대표되는 지배층에 대한 풍자, 군사들로 대표되는 빈한한 평민들의 안정적인 삶 추구, 전범적인 영웅에 의한 질서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
적벽가의 주요 등장인물로 조조, 정욱, 유비, 관우, 제갈공명, 그리고 이름 없는 다수의 군사들을 꼽을 수 있다. 조조는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곤궁하게 만드는 지배층으로 형상화된 인물이다. 실제 역사상의 조조는 이름 높은 영웅이나, 적벽가의 조조는 비판과 조롱, 야유의 대상이자 무책임하고 잔인하며, 허례와 위선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전쟁 전에는 부하들의 인심을 얻지 못하고, 전쟁에 패한 후로는 부하들에게 조롱당하며, 억울하게 죽은 병사들의 원혼인 새들에게 비판받고, 가장 믿었던 부하인 정욱마저 그를 놀려댄다. 그는 어리석은 ‘간웅’ 조조로, 철저히 희화화된다.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후 패주하는 과정에서, 조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골계적인 인물로 추락한다. 한때는 큰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영웅이지만, 이들 대목에 이르러서는 눈앞의 상황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망스러운 범인(凡人)으로 형상화된다.
정욱은 적벽가 전반부에서는 조조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로 엄숙함을 유지하나, 후반부에 이르러 가장 적극적으로 조조를 조롱하고 비웃는 인물로 나타난다. <조조패주> 대목을 전후로 그 성격 및 역할이 전환되는 것이다. 본래 『삼국지연의』의 정욱은 조조가 가장 신임하는 뛰어난 인물도 아니었으며, 조조를 조롱하거나 비웃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적벽가에서 정욱은 불의한 권력과 지배층을 상징하는 인물인 조조의 측근에서 그를 매도하고 희화화하는 인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정욱은 겉으로는 상전에 복종하는 듯하나, 실제로는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조롱한다는 점에서, 춘향가의 방자나 봉산탈춤의 말뚝이 등과 같은 방자형 인물로 볼 수 있다.
유비는 천하 획득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유비와 같은 인물상의 구현에는 긍정적인 영웅의 활약을 통해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던 평민층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삼국지연의』의 유비는 재덕과 용맹을 두루 겸비한 인물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현인(賢人)들을 예로써 대우했다. 적벽가의 유비 형상도 이와 동일하다. 제왕다운 아량과 풍모를 지닌 인물로, 유능한 인물을 적재적소에 등용할 줄 알며, 인애(仁愛)와 후덕함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다. <삼고초려> 대목은 유비의 긍정적인 영웅상을 부각시키는 대표적인 소리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관우는 충의(忠義)를 대표하는 인물로, 용맹과 무예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영웅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용맹을 떨쳤던 인물인 관우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재신(財神) 혹은 무신(武神)으로 신격화되었고, 중국의 관우 신앙은 임진왜란 중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관왕묘(關王廟)가 세워지면서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다. 관우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적벽가에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특히 조조와 그 장수들을 사로잡았다가 놓아주는 적벽가의 결말을 통해, 관우는 불의한 인물을 징계하고, 약자를 구하는 의로운 존재로 부각된다.
제갈공명은 충절과 지혜를 표상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서 공명은 뛰어난 전략가로, 책임감이 강할 뿐만 아니라 문장과 서화, 탄금(彈琴)에도 두루 능한 인물로 그려졌다. 적벽가에서도 공명은 지혜로운 전략가로 등장해 유비의 책사로 활약한다. 조조와 손권 사이에 싸움을 일으키기 위해 손권과 잠시 손을 잡는 계략을 도모하고, 신출귀몰한 재주로 동남풍을 불게 하여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특히 <동남풍 비는 대목>에서, 지모와 예지를 겸비한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로서의 공명상이 크게 부각된다. 네이버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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