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6.15 09:59
“이별하면서 써준 시는 너무 가슴에 와 닿는 거라 여기서 그냥 알려드리고 싶지가 않네요. 인터넷에서 각자 찾아서 음미해 보면 더 좋겠어요.”
지난 달 퇴계 이황 선생의 양생법이라는 ‘활인심방(活人心方)’을 배우는 첫 시간이었다. 강의 장소가 고색창연한 운현궁 노안당 안인데다 사방 문 밖으로 뜰의 녹색 물결이 운치를 더했다. 덩달아 마음도 일렁이어서였을까. 강사가 운을 뗀 퇴계의 삶 가운데 학문 보다는 사랑에 귀가 솔깃했다. 조선 중기 ‘동방의 주자’이자 ‘영원한 스승’으로서 지금도 천 원 권에 실어 기릴 만큼 명망 높은 학자가 기생과의 사랑이라? 10명 남짓 수강생들의 심사를 읽었는지 강사는 이별의 시를 슬쩍 넘어갔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48세의 퇴계가 18세의 관기 두향에게 얼마나 짠한 이별시를 건넸는지 궁금해 집에 오자마자 찾아 봤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死別己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生別常惻測)
두향은 첫 눈에 퇴계를 사랑하게 된다. 대쪽 같은 성격이었으나 당시 아내와 아들을 연이어 잃은 퇴계 역시 글과 가야금에 능하고 외모까지 출중한 두향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이 사랑은 퇴계가 경상도 풍기 군수로 발령이 나면서 9개월 만에 끝난다. 그는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말년엔 안동에 은거하다 세상을 뜬다. 두향은 소복차림으로 나흘간을 걸어 안동에 가서 임을 재회한다. 이후 그녀는 퇴계와 사랑을 이야기하던 단양의 장회나루 건너편 강선대에 초막을 짓고 그를 그리워하다 생을 마친다.
사람을 살리는 마음법
사실 퇴계라면 학문 사랑이 먼저 떠오른다. 고려 말 유입된 성리학의 토착화에 큰 획을 그은 성리학의 대가 아닌가. 그간 몰랐던 두향에 대한 사랑에 내 귀가 솔깃해지긴 했어도 먼 옛날 러브스토리야 몰라도 그만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사랑 활인심방을 몰랐다는 건 나의 무식함이 크다. 20대에 주역 공부에 열중하느라 건강을 잃은 퇴계를 장수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활용되는 양생비법인데 말이다. 몸에 좋다며 반짝 관심을 끌다 사라지는 것들이 수 없이 많은 요즘에 5백년을 이어오다니 이유가 있지 않을까.
활인심방은 문자 그대로 사람을 살리는 마음법이라고 한다. 중국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아들 주권이 지은 ‘활인심’을 퇴계가 번역하고 생각을 덧붙여 양생비법서로 재탄생시켰다. 우주의 질서와 인간, 사람의 마음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 성리학에서 특히 심성을 어떻게 닦고 길러야 하는가에 집중한 퇴계이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활인심방에서는 “모든 사물은 마음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며 무엇보다 마음의 중요성과 치유가 강조된다. 마음관리야말로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마음자리가 고요하면 정서가 가라앉지만 마음이 움직이면 신(神)이 피로해지는 것이고, 참된 것을 지키면 기를 통솔할 능력이 속으로 가득 차 있게 되지만, 바깥 사물을 따르면 마음의 초점이 제자리를 벗어나서 옮겨간다. 초점이 옮겨가면 신(神)도 달려 나간다. 신이 달려 나가면 기가 흩어진다. 기가 흩어지면 병이 생기고, 다치거나 죽는다.” 만 가지 병을 막고 오래 평안하기위해서 ‘중화탕(中和湯)’이 처방된다. 무형의 약재 30가지를 넣어 약한 불에 반이 될 때까지 달여서 언제든지 따뜻하게 마시라니 진짜 탕약에 다름 아닌 기분이다.
그래도 사랑
약재 중 10가지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사무사(思無邪) - 사악한 일을 생각하지 말라.
2. 행호사(行好事) - 좋은 일만 행하라.
3. 막기심(莫欺心) -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라.
4. 행방편(行方便) - 편안하게 행동하라.
5. 수본분(守本分) - 자기의 본분을 지켜라.
6. 막질투(莫嫉妬) - 시기하고 샘내지 말라.
7. 제교사(除狡詐) - 교활하고 간사한 마음을 버려라.
8. 무성실(無誠實) - 모든 일에 성실하도록 힘쓰라.
9. 순천도(順天道) - 하늘의 뜻을 따르라.
10. 지명한(知命限) - 자기 수명의 한도를 알라.
냉장고에 붙여놓고 상시 복용해야할 ‘보약’이다.
호흡과 자세를 단련하는 좌식팔단금(坐式八段錦)도 활인심방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매일 하는 스트레칭이나 코어 같은 운동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책상다리로 앉아서 팔단금의 8가지를 순서대로 하면 하초는 따뜻하고 상초는 서늘한 가장 이상적인 몸 상태가 된다고 한다. 종일 책과 씨름하느라 혈액 순환과 전신 건강이 나빠지기 십상이었던 퇴계 같은 옛 선비들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건강 체조였다. 효과는 좋다는데도 동작은 어렵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입안의 침마저도 ‘신비한 진액’으로 몇 차례 삼키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를 매일 생활화함으로써 퇴계는 병약함을 이기고, 마흔을 넘기가 쉽지 않던 당시 69세까지 살았다. 그러나 과연 활인심방 덕분만이었을까. 두향과의 사랑이 몸과 마음에 윤활유가 되지는 않았을까. 늙어갈수록 추억을 먹고 살아간다는데, 아무리 하세월 마음과 몸을 단련한들 짧은 사랑의 긴 여운만 했을까. “매화에 물을 주어라”가 이 세상에서 퇴계의 마지막 한 마디였던 건 마음 깊이 두향을 두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런 실마리를 잡아 역사 드라마며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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