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
진눈깨비 /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갓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 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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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1 : 겨울 퇴근길목이다. 진눈깨비가 날리고 하늘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마천루 사이로 한 사내가 사각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걸어간다. 경적소리, 따각따각 구둣발 소리, 말소리, 바람소리, 스팀이 품어내는 연기···어깨에 부딪히는 사람의 숲을 해치며 정류장으로 향한다.
신호등이 바뀌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걷는다. 누군가와 부딪혀 서류봉투를 떨어뜨린다. 봉투안 흰 서류뭉치가 짓눈깨비에 날린다.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다말고 생각에 잠긴다. 대학을 졸업하며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푸른 신호가 바뀌고 경적이 쏟아진다. 덩그렇게 횡단보도 중간에 허리를 굽인 채 엉거주춤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자세에서 옆을 둘러본다. 세상은 낮고, 미등을 켠 차들이 어두운 거리로 서서히 밀려온다. 진눈깨비가 미등에 엉긴다. 눈발이 더욱 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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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2 :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다. 어두운 골목에 빈 트럭이 시동을 켠 채 주차돼 있다. 덜덜덜~시동소리가 골목을 낮게 울린다. 개짓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눈오는 밤. 눈발이 사납다. 이미 상점은 이미 문을 닫았다. 졸고 있는 가로등 아래 취한 사내들과 눈을 털던 여자들도 사라졌다.
트럭 안에 한 사내가 보인다. 그는 핸들을 움켜준 채 캄캄한 길을 응시하고 있다. 「그래, 이 거리는 낯이 익다!」
이미 눈이 거리를 덮어버렸다. 핸들을 쥔 채 쓰러진 사내, 이마가 경적을 세차게 누른다. 경적이 찢어질 듯 울린다. 계속되는 경적, 商店에 불이 켜진다. 몇몇 2층 창문이 열리고 팔짱을 낀 채 여자들이 수근대기 시작한다. 고개를 든 트럭 운전사의 눈이 젖어있다. 「이 거리는 낯이 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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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奇亨度·1960.2.16~1989.3.7)는 『입속의 검은 잎』이란 유작 시집을 내고 스물아홉의 나이로 죽었다. 1989년 3월초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다. 병명은 뇌졸중. 그가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거친」애로영화라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심지어 동성애자라는 말도 나돈다.
이런 루머들은 기형도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부각시키기에 충분하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사후 그에 쏟아진 찬사가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평론가들도 마찬가지다. 무수한 비평이 쏟아졌지만 모두 기형도의 중압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형도는 유쾌하고 친화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그가 보여준 실제 삶과는 다른 것이었다. 시집 속 자아는 ‘타자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자신 속에 유폐된 소외된 존재의 초상(남진우)’이었다. 이중적 삶을 산 것일까.
평범한 지방 보험국 직원인 카프카처럼, 낮에는 고객들과 말씨름하다 밤에는 골방에 갖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책 속에 파묻혀 소설 습작에 매달렸다. 카프카는 스스로 「우리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이 아니라면, 왜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고 되뇌였다. 일상에서 벗어나 지적 충격을 동경했다. 하지만 生前에 그는 인정받지 못했다. 인정은커녕 유작이 나왔을 때 보험국 동료들은 의아해 했다. 그러고 보니 카프카도 41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일찍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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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68년생 여류감독인 박찬옥 감독이 지난 2002년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에 모티브를 얻어 동명의 장편 극영화를 만들었다.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全文)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은 박해일·문성근·배종옥이 분했다. 복잡하지만 그리 어둡지만은 않은 영화다. 사랑하는 여자를 유부남에게 두 번에나 뺏기고 삼각관계에 처한다는 내용이지만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배우 배종옥이 1인2역으로 분했고 박해일이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남우상을 탔다. 박찬옥 감독은 청룡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내용은 대강 이렇다. 대학원생 이원상(박해일 扮)은 애인(배종옥 1인2역 扮)으로부터 한 유부남 한윤식(문성근 扮)을 사랑하게 됐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호기심과 질투 내지 욕망이 더해져 유부남이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사에 취직하는 이원상. 그는 취재도중 수의사 겸 아마추어 사진작가인 박성연(배종옥 1인2역 분)을 만난다. 이원상은 그녀의 자유분방한 매력에 호감을 느껴 박성연을 잡지사 사진기자 자리를 소개하지만 한윤식이 박성연을 유혹, 삼각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얼핏 보면 진부한 스토리 같지만 심리코드를 읽어 내려가면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게 있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이가 갖는 자괴감, 되찾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질투와 절망감, 하지만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박성연과 한윤식을 쫓아가는 이원상의 호기심이 잘 그려져 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 일부 극장에서 관객의 요구로 잠시 재개봉되긴 했으나 4만명을 넘지 못하고 조기 종영됐다. 관객의 평은 대체로『재미있지만 난해하다』였다. 기형도가 이 영화를 봤다면 어떤 느낌일까.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