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麗的 詩 ·人

석문(石門) / 조지훈

yellowday 2016. 5. 25.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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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石門) / 조지훈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이해와 감상


<<  이 작품의 소재는 경북 영양 일월산에 있는 황씨 부인당의 전설이다. 전설에 의하면,

일원산에 살던 황씨 처녀가 자신을 좋아하던 마을의 두 총각 중에서 한 명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첫날 밤 잠을 자기 전에, 신랑이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신방 문에 비친 칼그림자가 비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신랑은 자신의 연적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그대로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마당의 대나무의 그림자였다. 신부는 원삼과 족두리도 벗지 않은 채 신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한을 안고 죽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신랑은 몹시 뉘우치면서 그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일원산에

부인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바로 원한을 품은 채 죽은 신부이다. 그녀는 '당신'이 돌아올 그 날을 기다리며 '꺼지지 않을 촛불'을

준비하고, 천 년을 기다려서라도 '당신'을 만나야지만 '원한'이 풀릴 것이며, 그 때에서야 비로소 '티끌로 사라지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돌문이 열리는' 것은 원한이 해소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자는 지극 정성이 아니면 돌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그녀의 원한이 너무도 사무쳐서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마지막 연에서 '당신'도 자신처럼 '다시 천 년을 앉아 기다리기 전에는 돌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는가. 결국 이 시는 설화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한 여인의 풀 수 없는 한의 정서를 고백적으로 표현한

산문시라 하겠다.

  이 작품 외에도 첫날밤 도망간 신랑을 기다리며 한을 품고 죽은 신부의 설화를 소재로 삼은 작품에는 서정주의 <신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