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일삼던 중세 기사계급서 오늘날 강인한 모습 만들어져
13세기엔 세련된 남성성 요구… 독서·화술 등 덕목으로 부각
"性정체성은 사회가 만든 것"
남자의 품격
차용구 지음|책세상|488쪽|2만3000원
프랑스의 여성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의 정체성 역시 사회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차용구(51)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의 지론이다. 서양 중세사 전공인 차 교수는 오늘날 남성성(性)이나 '남자다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세의 기사도(騎士道)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김정운 교수의 베스트셀러 '남자의 물건'과 장동건 주연의 인기 드라마 '신사의 품격'을 합친 듯한 책 제목이지만, 실은 중세사를 다룬 본격 학술서에 가깝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무기를 지녔고, 이를 휘두르며 피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노라." 잉글랜드의 윌리엄 정복왕이 죽기 전에 했던 고해성사가 보여주듯이, 중세의 남성들은 무엇보다 군인이자 전사(戰士)였다. '전투적 남성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이 십자군 전쟁이었다. 본래 기독교의 정신은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평화주의에 가까웠지만,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이교도에 맞선 폭력은 정의롭고 성스럽다는 '성전론(聖戰論)'이 확산됐다.
이와 더불어 치명상을 입어도 굴하지 않고 적을 해치우며, 후퇴하기보다는 동료들과 장엄하게 전사하는 것이 이상적 남성상으로 부각됐다. 차 교수는 "잔다르크가 화형을 당했던 것도 남성의 전유물인 갑옷을 입는 '남장변복(男裝變服)' 행위가 남성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1214년 프랑스가 신성로마제국·잉글랜드 등의 다국적 연합군에 승리를 거둔 부빈(Bouvines) 전투. 기사 견습과 마상경기, 사냥과 전쟁은 중세 시대 남성들의 일상이었다. /책세상 제공
중세 시대에 남성성을 상징했던 '군사 스포츠'가 마상경기(馬上競技)였다. 마상경기는 당초 1대1 시합이 아니라 단체 시합에서 출발했다. 기사들이 평원에서 두 편으로 나뉘어 매복하고 기습하며 싸움을 벌이는 '모의 전투'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살상보다는 생포에 중점이 놓였고, 생포한 포로는 두둑하게 몸값을 받고서야 풀어줬다. 차 교수는 "당대 최고의 기사 윌리엄 마셜은 평생 500여 명의 기사를 생포해서 부와 명성을 쌓았다"면서 "마상경기는 가난한 기사가 한밑천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과도한 아드레날린이 살인과 약탈, 배신으로 이어지자 '폭력적 남성 집단의 위험성'을 길들이고 제어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12~13세기 무렵부터 부각된 미덕이 '세련된 남성성'이다. 이제 남자들은 잘 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학과 음악에 능하고 대인관계와 매너를 지녀야 하며, 풍부한 독서와 화술(話術)까지 겸비해야 하는 것이다. 나환자촌과 구빈원을 자신의 영지에 건립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경쟁이 일어난 것도 이즈음이다.
- 차용구 중앙대 교수. /고운호 객원기자
이 책이 독특한 점은 오늘날 프랑스 북부·벨기에·네덜란드에 해당하는 플랑드르 지역을 다스렸던 귀족 가문의 역사를 통해 기사도의 탄생과 변화 과정을 역추적했다는 점이다. 차 교수는 이 지역 교회의 사제인 랑베르가 1190년대에 작성한 '긴느 백작 가문사'를 분석해 귀족 가문의 후계자인 아르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귀족 가문의 '미시사(微視史)'와 중세사라는 '거시(巨視) 담론'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입체적으로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조닷
차 교수는 "서양사가 겉보기엔 조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19세기의 민족주의적 정치·외교사에서 20세기의 사회·경제사를 거쳐 21세기에는 성(性)과 지역까지 방법론과 시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며 "역사학은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반응하는 예민한 학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