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마종기 시인의 ‘가을’마따나 가벼워지기 때문인가.
어느새 왔나 하면 어느새 가버리고 마는 이 좋은 계절, 가을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한껏 멋을 내기에 좋은 때이기도 하다.
멋이야말로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추구하는 게 아닌가 싶다. 겉모습의 맵시는 물론이고, 놀이와 일에서도 멋이 편함이나
실속에 앞서려 한다. 아마 나이 들어서도 그렇듯 멋을 놓지 않으려는 한 ‘청년노인’이지 않을까.
“사람이 태어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멋지게 살기 위해서다”라고 단언한 이도 있다. 미모며 부, 명예, 권력의 삶은 멋져 보인다.
하지만 친절함과 너그러움, 자신감, 용기, 유머감각 같은 속멋이 없다면 진정한 멋쟁이는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멋은 ‘매력’이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사람을 선인과 악인이 아닌, 매력이 있는 사람인가, 지루한
사람인가로 분류해야 한다며 매력을 중시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 교수도 “성공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조건은 지능이나 학벌, 운이 아니라 매력”이라고 강조했을 정도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매력자본’이란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는 마당이다. 사회적 지위를 얻고, 돈을 벌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이
곧 매력이란 의미다. 얼마 전 국내의 한 아르바이트 전문포털의 조사를 보면 외모가 잘생긴 사람이 못생긴 사람보다 33% 더
높은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매력자본에서의 매력이란 단지 외모만이 아니라 활력과 세련됨, 유머감각,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기술까지 일컫는다.
자신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후천적인 기술 또한 매력자본이란 얘기다.
매력의 포인트
- ▲일러스트=이철원
매력자본이 젊은 층만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다. 더 이상 사회적 지위나 돈을 위해서는 아니더라도 쓸쓸하지 않은 노년을
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자본이 매력이기 때문이다.
농담 반 진담 반 퍼진 ‘세대별 평준화 시리즈’ 유머에서는 60, 70대엔 미모와 성(性)의 평준화가 이뤄진단다.
매력자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쉬운 타고난 뛰어남도 결코 세월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후천적인 기술이 점점 매력의 포인트로 작용하게 된다.
심지어 극한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사를 가르는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빅터 프랭클린 박사의 자전적 체험수기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도 저자는 깨진 유리조각을 감춰
거울을 만들고 마당에서 주운 사금파리로 면도를 했다. 침을 발라 머리를 가지런히 빗었고, 찢어진 옷도 양말 실을 뽑아서
단정하게 꿰매 입고 다녔다. 걸음걸이도 언제나 똑바르도록 이를 악물고 몸을 지탱했다. 건강하게 보여 가스실이 아닌 사역실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언제나 가스실 행렬에서 제외됐고, 독일의 항복 순간까지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이후 장수를 누렸다.
행복해서 웃지 않더라도 웃음으로써 행복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자신을 가꿈으로써 정신과 육체의
자포자기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프랭클린 박사는 외적인 부분에 신경을 쓴다는 게 어떤 상황에서건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누구라도 “이대로 살다 죽게 냅둬”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움직일 수 있는 한, 늙을수록 남자일수록 깔끔하게
면도하고, 이왕이면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는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매력은 가능하다. 남성호르몬의 분비도 왕성해져서
노화방지까지 된다지 않는가.
사라져 가기 전에
최근 한 모임에서 본 60대 아저씨는 평범한 차림새에 팔찌 하나만으로도 매력을 발했다. 왼손에는 짙은 갈색 가죽 밴드의 시계를,
오른손에는 같은 색의 팔찌를 차고 있었는데 그 나잇대 남자들에게선 드문 멋이 났다.
그런가 하면 목을 따스하게 감싸면서 스웨터와 어우러진 스카프 하나로 매력이 엿보인 80대 노신사도 눈에 띄었다. 얼굴의 검버섯을
굳이 없애진 않았지만 컨실러 크림으로 살짝 가린 듯했다. 노령에도 자기관리를 하며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반면 할머니가 돼도 “예쁘다”는 소릴 듣고 싶어 한다는 여자라 건만 되레 무신경한 모습 또한 눈에 띄기 마련이다.
성형이나 대단한 치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때와 장소에 맞는 차림은 해야 하는데, 아무리 동네라고 해도 체력단련강좌에
홈드레스 같은 옷을 입고 오는 분도 있다. 어떤 분은 눈에 늘 핏발이 서려 있어서 어디 피곤하시냐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원래
그렇단다. 누군가 옆에서 “요즘은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거들자 단박에 손사래를 쳤다. “알지만 안 해요. 그냥 사는 거지.
일흔이 낼 모랜데 누가 본다고 그래?” 얼른 내가 되받았다. “누가 보긴요. 피곤하시냐고 묻는 제가 보구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보잖아요.”
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외출할 때 외엔 화장은커녕 종일 거울조차 들여다보지 않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나이 들며 피부가
처지느라 그런지 어느 날 눈에 쌍꺼풀이 생기는 거였다. 쌍꺼풀이 자리 잡도록 아이라인을 더하자니 눈썹도 그리게 됐다.
아침마다 3분여 가벼운 눈 화장을 하게 되면서 왠지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을 듯 기분이 좋아졌다. 누
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보는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앞서 ‘가벼워진다…’로 시작된 ‘가을’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론지 사라져간다.’ 그러나 사라져갈지라도, 아니 사라져가기 전에
속은 물론이고 겉도 저마다 잘 익은 매력으로 가꿔나가는 인생이면 좋겠다. 누가 본다고 그래? 그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내가 보니까 말이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