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의 '태평양시대 위원회'. 시사와 정치를 다루는 TV 프로그램 패널로 활동하고, 각종 모임과 위원회를 주도하는 등 누구보다 활력 넘치는 삶을 사는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집무를 보는 곳이다. 팔십이 넘은 나이(1928년생)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에게 '건강한 삶'이란 무엇인지, '나이 들어갊'은 무엇인지 묻기 위해 위원회를 찾았다.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서재에 들어서니, 큰 소파에 앉아 정갈한 자세로 책을 읽던 김 교수가 "어서오시게" 하며 기자를 반겼다.
여든여덞의 노교수는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달린다
각종 모임과 사회활동을 주도하고 2~3일에 한 번씩은 전국을 다니며 강의를 한다. 20~30대를 위한 토론회도 주관하고, 최근에는 '80세 이상 고령 이산가족 성묘방북 추진위원회' 명예위원장도 맡았다. 10월에는 80세 이상 장수인의 소모임인 '장수클럽(가칭)'도 만들 계획이다. 누구보다 바쁘게 생활하는 김 교수는 평소 어떤 마음가짐으로 생활하고 있을까.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아침에 명랑한 기분으로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인터뷰가 있는 날이잖아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것이 늘 기쁩니다. 사실 나는 매일 기분이 좋은 편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적당히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요즘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가요?
늘 새로운 것을 기대합니다. 영어로 하면 'What's next?(다음은 무엇인가)'일까요.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될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매일 궁금하고 기대돼요.
교수님이 젊고 활기차 보이는 이유가 거기 있었군요.
맞아요. 기대감이야말로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 주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기대한 만큼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망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기대감을 품는 그 순간, 매 순간을 진심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요. 삶 속에 젊음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은 기대감을 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매일 지키는 생활습관이 있으신가요?
개인적인 일이긴 하지만, 나는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어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종교가 제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TV를 켜거나 신문을 읽는 일보다 먼저 하는 게 있어요. 성경 몇 구절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 구절이 소개되고 밑에 해석이 달려 있는 일반 기도서와 달리, 내가 읽는 책은 성서에 적혀 있는 말만을 충실히 담은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교수님께 어떤 의미가 있나요?
삶의 방향을 찾고, 정신과 철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성경을 읽고 마음으로 새기면서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나는 어떻게 늙어가야 할지, 어떤 노년기를 보내는 게 좋을지, 어디를 향해 떠나야 하는지 등을 생각하지요.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시작과 끝, 찰나와 영원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색을 가능케 합니다.
매일 아침 글도 쓰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2008년에 시작했으니 벌써 7년이 넘었어요. 매일 아침 6시쯤 200자 원고지 석 장 정도의 글을 쓰지요. 제가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www.kimdonggill.com)에 올립니다.
여든여덟의 나이에도 기억력이 좋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비결이 여기 있었군요.
이것만이 비결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글을 쓰려면 어쨌든 생각을 많이 해야 하니까요. 무슨 글을 쓸까, 무슨 생각을 전달해볼까 매일 고민하죠. 하루 평균 3000~4000명이 제 글을 읽으니 긍지와 보람도 있고요.
과거 '목요(木曜)강좌'를 수년간 하셨고, 계속 글쓰시는 걸 보니 무엇이든 꾸준히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 번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꾸준히 합니다. '오늘은 주말이니까', '오늘은 약속이 있으니까', '오늘은 피곤하니까' 같은 핑계나 변명을 붙여서 마음먹은 것을 거르지 않습니다. 건강에 대한 나름의 신념 중 하나는 '생활습관은 꾸준한 게 좋다'입니다. 몸에 지닌 습관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마음을 정갈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사 하지 않고 한 곳에 오래 거주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도 '꾸준함'과 연관 있나요?맞습니다. 사람마다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는 요소가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꾸준함과 익숙함입니다. 꾸준한 습관과 생활환경이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 같습니다. 한 집에 오래 사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1947년부터 살던 집에 아직도 살고 있으니 벌써 68년째네요. 멀리 여행을 가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안식처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됩니다.
매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건강의 비결
기자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김동길 교수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발음하며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부드러운 눈빛 속에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자신만의 철학이 확고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에게 몸과 마음의 건강에 대해 물었다.
교수님은 건강하십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그럭저럭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 노력하시는 게 있습니까?
중용(中庸)을 지키는 것입니다. 뭐든지 적당한 게 가장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벌 때도, 뭔가를 원하거나 기대할 때도 적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불행해지거든요. 식사할 때도 중용을 생각합니다. 과식하지 않기 위해서이지요. 건강의 가장 큰 적은 과식이라고 생각해요. 혈압과 혈당이 높고, 각종 성인병에 걸리는 사람 중 상당수는 비만하잖아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여유로움, 긍정적인 마음가짐,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매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 어떤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강한 정신력입니다. 유신 시절, 감옥에 갇힌 적이 있어요. 1심 재판 결과 15년 형을 받았죠. 선고를 받고, 항소를 포기했어요.
제자들과 구치소 직원을 포함한 모든 지인이 항소하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는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떳떳했고, 항소한 게 잘 돼서 감옥에 가지 않게 되더라도 얼마 안 가 또 잡혀올 것 같았거든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감옥에서 15년을 보내는 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더라고요.
감옥에서 주는 콩밥과 맛없는 시래기국도 다 먹었어요.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하니까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함께 있던 사람들이 "처음 온 게 아니구먼" 하고 말할 정도였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어요. 혼자 있을 때는 밥을 챙겨 먹고 빨래하는 게 매일 걱정이었는데 여기 오니 옷, 밥, 잠자리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정권이 바뀌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지금도 감옥에서 살 자신이 있어요. 거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요.
교수님 같은 마음가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좋은 책' 한 권을 선정해 읽고 그 책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인생은 무엇이며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답, 힘들거나 괴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책 한 권이 있다면 마음이 흔들릴 때 안정을 찾을 수 있거든요. 제 경우에는 성경입니다.
늙는 것을 두려워 말고, 죽을 날을 미리 생각해두세요
김동길 교수는 최근 신간을 출간했다. 제목은 <나이듦이 고맙다>이다.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고 정권이 10회 바뀌는 것을 봐온 그가 나이 듦에 대한 고찰을 전하는 것이다.
나이 듦에 대한 집필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나이가 드는 것은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늙었다'는 말은 쇠락·후퇴·버려짐 같은 단어와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나이 드는 것을 절대로 피할 수 없어요. 성형수술이나 꾸준한 관리 등으로 젊게 보일 수는 있지만 절대 젊어질 수는 없지요. 언젠가는 맞이해야 하는 이 수순을 싫은 것만으로 받아들인다면 삶의 상당 부분이 불행해집니다.
인생의 겨울을 어떤 태도로 보내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져요. 책을 통해 내 나름의 나이 듦에 대한 고찰을 전달하고, 많은 이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의미 깊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에 출판을 결심했습니다.
교수님의 고찰에 의하면, 나이 듦이란 무엇인가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중년기를 지나면서부터 지인들과 뜻하지 않은 사별을 여럿 경험했어요. 죽음과 노년의 시간에 대해 고찰했죠.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인지라, '나도 이러다 언제 생이 끝날지 모른다'는 야릇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개개인마다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언가 열망하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게 있기 때문에 죽는 게 두려운 것이잖아요. 그래서 나이 듦이란, 평생의 사명을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이며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명을 완벽하게 이뤄내거나 풀어내고 가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사명을 더욱 완성시키기 위해서이며 그 기회를 얻은 것이니까요.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꿈과 사명을 갖는 것이지요. 자신이 일생을 바쳐서 이뤄내고 싶은 게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뤄내고 싶은 목표를 향해 전진하느라 매 순간이 기대감으로 가득 차지요. 나이 들어서 청년 때보다 삶이 단조롭고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은 이 부분을 특히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저는 가슴속에 꿈과 사명이 있기 때문에 늘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고, 가장 좋은 것은 아직 갖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의 한 구절을 소개하지요.
Grow old along with me!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세!
The best is yet to be,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The last of life, for which the first was made:
인생이 시작은 인생의 마지막을 위해 만들어진 것.
- 랍비 벤 에즈라(Rabbi Ben Ezra), 로버트 브라우닝
교수님의 꿈과 사명은 무엇인가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것,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 우리나라가 통일하는 것,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하는 것 등입니다. 이런 것들이 꼭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이 내가 하루하루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지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한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연한 수순이면서, 인생의 완숙미를 더해가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나이 듦에 대한 인식만 바꿔도 매일 아침 눈 뜨는 게 기다려질 겁니다. 세월이 물처럼 빨리 흘러가지요? 허망하다고 생각지 마세요. 빨리 흘러가기에 삶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이 삶을 끝까지 잘 이어나가려는 열망도 커지는 겁니다.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두라는 말도 하고 싶네요.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만큼 인생을 허무하게 보내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보세요. 살아 있는 시간이란 아름다운 인생의 마침표를 위해 준비하는 행복한 기간이라고 여기면 인생이 좀더 의미 깊어질 겁니다. 조닷
입력 : 2015.10.07 14:13
나이 듦을 두려워 하지 마세요.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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