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5-05-08 18:56 | 수정일 : 2015-05-08 19:51
최근에 인터넷을 달군, 초등학생이 썼다는 소위 말하는 “잔혹동시”는 이렇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내가 맨 먼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 과연 시인가?’하는 질문이다.
만약 시가 아니라면 우리의 모든 논의는 헛되기 때문이다. 시가 아니라면 출판을 할 리도 없었고, 더구나 이 시가 포함된 다른 모든 작품을 회수할 필요도 없었겠고, 그렇다면 ‘아이가 심리적으로 이상하다’란 말을 할 리도 없었을 터이며, 이것이 시가 아니라면 예술이 어떠니 운운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그것의 자유 또한 운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인가? 필자의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글을 써오라고 해서 썼다는 글이 갑작스레 떠오른다.
제목: 분수
“분수는 공중에서
두 팔을 벌리고 뛰어내린다.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서
두 발을 벌리고 뛰어내린다.”
이 글을 보여줬을 때 아빠인 필자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우리 가문에 위대한 시인이 태어난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놀라는 아빠에게 고무되었는지 아이는 의자를 갖고 오더니, “아빠! 아빠!” 하고 외치고는 “자, 이렇게요!” 하면서 의자 위로 올라가 두 팔을 벌리며 뛰어 내렸다. 분수가 이렇게 떨어진다며, 또다시 의자 위로 올라가더니 다시 발을 벌리고 뛰어내린다. 그 순간 나는 아이에게서 펌프에서 나오는 물을 손으로 만지며 “w-a-t-e-r!”하고 속으로 외쳤다는(말을 할 수 없었다) 헬렌 켈러의 감동을 볼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말 속에서 필자는 아이의 시적 영혼을 보고 있었다. 아이가 소원하는 자유라는 욕망과 형상이라는 감성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마리오처럼 내 아이는 은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분수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그렸을 뿐 아니라 자기의 영혼과 몸 사이에서 언어유희를 하고 있었다. 원시인들처럼 축제를 만들고 소원을 빌고 있었다.
두 작품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은 왜 시고 어느 것은 왜 시가 되지 않는가? 근대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시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위하여 몇 가지 범주를 만들었다.
그 첫 번 째가 시형이 짧고 음악적 정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잔혹동시”는 시 같이 보인다. “먹어”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각운을 만들고 강약격의 운보를 따르며 음악적 리듬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런 범주로는 시가 무엇인지를 규명하기가 힘들다. 우선 내 아들이 썼다는 소위 말하는 ‘시’도 그런 범주를 갖추고 있어 대등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근대시 이후의 내재율이라는 측면에서는 내 아들의 ‘시’가 시적 위용을 더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산문도 이런 형식을 갖추면 시가 될 수 있다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난 널
사랑하는데
넌 날
사랑하는가
이런 문장도 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엠씨 스나이퍼, 엠씨 몽 같은 래퍼들의 모든 랩이 다 시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케이팝 스타에 출연한 악동뮤지션의 이찬혁군도 시인이다. 크게 보면 인간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은 다 시일 수 있다. ‘아!’라는 짧은 감탄사에서 법정의 변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이 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시를 시라 이름 붙일 필요가 있을까? 소설을 소설이라 이름 붙이고 드라마를 드라마라고 이름 붙일 때는 필경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자 이제 사람들은 시의 특성을 “감성적 표현”이거나 “체험의 감성적 묘사”라고 말하길 즐겼다. 달빛의 유혹이나 사랑의 고백을 표현한 것이 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부당함이 있다. 초등학생이 즐겨 쓰는 일기나 편지, 옛 학자들이 즐겨 쓴 부(賦)나 서정적 산문이 시만큼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를 능가하는 감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이럴 경우, “잔혹동시”의 경우처럼 일상어와의 구별을 조건으로 내거는 시의 특성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럼 도대체 시란 무엇이란 말인가? 답답하니 말을 좀 해다오.
우리가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면 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온다. 고대로부터 전승된 시를 살펴보자. 「구지가」나 시편에 있는 다윗의 노래나 리그베다, 그리스 송가를 보자. 이들은 모두 신을 찬양하거나 귀신을 저주하거나, 그들에게 소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 모든 시는 원래 이렇게 시작하였다. “신이시여! 우리에게 양식을 주소서”, “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사랑의 신, 아모르여! 뒷집 영순이가 나를 사랑하게 하소서!”, “삼신님이여, 우리 아들에게 든 문둥병 귀신을 쫓아내소서!” 그러니까 신을 부르고, 청원을 하거나 신원(伸寃)과 소원을 하고 저주를 하는 일이 바로 시가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물론 오늘날도 종교인들은 이런 일을 게을리 하고 있지만 않겠지만, 근대의 계몽적 이성은 더 이상 신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고, 자연 그런 신에게 탄원하는 전근대의 유산은 이제 시의 형식으로 남게 되었다. 토템과 물신들은 자연과 마음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니 시의 원래 제의적 목적은 사라지고 그 수단만 남게 되었다.
근대의 사람들은 “주여, 때가 왔습니다.”고 노래해봤자 이제 더 이상 신을 바라면서 탄원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알 수 없는 그 무엇(Es)인 마음이나 자연에 대고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는 것이다.
“아침의 햇살처럼
너는 나를 에워싸고 타오르는구나.
봄, 오 내 사랑아!”
(괴테, 「가니메데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김현승, 「가을의 기도」)
이런 고통과 그 고통을 상징화하는 능력이 아이들에게 있을까? 일반적으로는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서양에서 견진성사를 하는 나이인 13세(만12세) 이후, 즉 어른의 세계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 가능하다. 물론 예술이 모방인 한, 유사한 체험의 모방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내 아들이 쓴 시처럼 우연한 기회에 만들어진 것이지 아이의 고유한 “세계”라고 보긴 힘들다.
소위 말하는 “잔혹동시”를 담고 있는 시집을 보면 거기에는 아이답지 않은 표현들이 많은데 그것이 실제로 가필 없이 아이가 직접 썼다고 하더라도 어른들의 세계 같이 보이는 이유는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시에 그런 고통과 탄원이 상징화되지 않으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시의 내용이 일상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잔혹동시”는 일단 시가 아닌 것 같으며,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밝힌 일기와 비슷한 장르로 보이기에 그것을 쓴 아이는 네티즌들이 말하는 심리적으로 “이상한” 아이로 비칠 수 있고, 이 경우 아이가 아니라 그 대리인과 그 아이의 글을 출판한 사회적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들이 출판한 책은 당연히 예술이 아니라 사회적 진술로서의 책임, 즉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
만약 이 “잔혹동시”의 내용이 잔혹할지라도 예술이, 즉 시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이렇게 바꾸어 써보자.
학원에 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깜빡 잠이 든 날
난 엄마 꿈을 꿨다.
꿈속에서 엄마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내가 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나는 집으로 오기가 무서웠다.
근대의 성인들의 문학에도 마찬가지로 잔혹함과 추함, 그로테스크함이 많다. 그러나 이 역시 일상어라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런 문학의 역사는 이미 우리가 많이 알고 있다. 위의 개작시에서는 보다시피 아이가 느낀 소위 그 “잔혹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다. 어렵지만 독일 미학자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해 말하자면 “예술은 이데올로기가 숨기는 것을 고발하는 것”이다. 일상어로는 이렇게 되지 않는다. 부정성, 즉 내가 잔혹함을 당한 언어가 예술성을 만든다.
아이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왜곡이 없는 “사무사(思無邪)”의 세계다. 시에 대한, 그리고 예술에 대한 생각이 없는 어른들이 그런 아이들을 망쳐서는 안 된다. 이런 글을 쓴 아이에게 시라는 문학이 트라우마로 남아서는 안 된다. 나아가 혹시라도 그 아이가 “잔혹한” 아이로 손가락질 받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우리는 시가 무엇인지, 시의 목적은 무엇인지,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 제대로 알고 아이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을 노래하고 신적 비밀을 예언한다던 이온과 논쟁을 한 플라톤이 『이온』이라는 저작에서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리가 찬미하는 저 위대한 시의 저자들은 어떤 예술의 규칙들을 통한 탁월함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영감의 상태에서 자기 것이 아닌 영혼에 사로잡힌 채 노래한다. 그래서 서정시의 시인들은 신성한 광기의 상태로 시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노래하는 것이다.”
(플라톤, 『이온』 533E) w조닷
변학수 문학평론가, 경북대 독어교육학과 교수
경북 문경 출생.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슈투트가르트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으로 석사학위(M.A.)를 받았다.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의 장학생으로 공부했으며, 같은 대학교에서 1993년 문학박사(Dr.phil.)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문학평론가로서 활동했고, 계간지 <시와반시>기획위원이며, <다층>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문학치료에 관심을 두어 2004년 경북대학교에 학과 간 협동과정으로 문학치료학과를 창설하였고,
독일 프리츠 펄스 연구소에서 문학치료사 훈련가 자격을 얻었다.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과 한국통합문학치료학회 회장,
한국아데나워학술교류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에세이집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을의 언어』(박문사, 2014), 평론집 『잘못보기』(유로서적, 2003), 『토르소』(글누림출판사,
2014)가 있으며, 『문학적 기억의 탄생』(열린책들, 2008), 『내면의 수사학』(경북대학교 출판부 2008), 『프로이트 프리즘』(책세상, 2004),
『문학치료』(학지사, 2007), 『통합적 문학치료』(학지사, 2006), 『문화로 읽는 영화의 즐거움』
(경북대출판부 2004), Hermeneutische und ästhetische Erfahrung des Fremden(독일어 iudicium, 1994) 외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는 『니체의 문체』(책세상, 2013), 『신들의 모국어』(경북대출판부, 2014)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글항아리, 2008)
『시와 인식』(문학과지성사, 1993), 『기억의 공간』(그린비, 2005), 『보리스를 위한 파티』(성균관대출판부), 『독일문학은 없다』
(열린책들), 『릴케-헌시·시작노트』(책세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