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麗的 詩 ·人

장미에 관한 시 모음

yellowday 2015. 1. 14. 16:52

<장미에 관한 시 모음> 홍수희의 '장미를 위하여' 외

+ 장미를 위하여

가시가 없는
장미는 장미가 아니다

동그라미 탁자 위
유리꽃병 속에서도
모진바람 불어 지난
담벼락 밑에서도

너의 모습 변함없이
두 눈이 시리도록
매혹적인 것은

언제든
가시를 곧추 세우고
아닌 것에 맞설
용기가 있기 때문

아니라고 말할
의지가 있기 때문

꽃잎은 더없이
부드러워도
그 향기는
봄눈처럼 황홀하여도

가시가 있어서
장미는 장미가 된다
(홍수희·시인 )


+ 장미

내가 키우는 것은 붉은 울음
꽃 속에도 비명이 살고 있다
가시 있는 것들은 위험하다고
누가 말했더라
오, 꽃의 순수여 꽃의 모순이여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저쪽
나도 가시에 찔려
꽃 속에 들고 싶다

장미를 보는 내 눈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신재한·시인, 서울 출생)


+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김승희·시인, 1952-)


+ 내가 정말 장미를 사랑한다면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오르는
그 집에 사는 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낙엽이 지고 덩굴 속에 쇠창살이 드러나자
그가 사랑한 것은 꽃이 아니라 가시였구나
그 집 주인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려다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복효근·시인, 1962-)


+ 장미공장

사람에게
한 송이 장미는
풍경이지만
벌에게는
밥벌이를 위해 구슬땀을 흘려야 하는
공장이라네
해가 뜨면
벌들은 작업복을 갈아입고 출근하고
해가 지면
꿀통을 지고 귀가한다네
뙤약볕 아래서
온몸에 꽃가루를 묻히며
겨울을 준비하는 노동
날카로운 톱니가 달린
장미의 생산라인을 바라볼 때
한 방울의 꿀은 신성하다네
비가 내리거나
꽃을 꺾어
공장을 폐쇄할 때
월급을 기다리는
일벌들의 가족들이여
벌들의 일터는
향기가 머무는 부지에서부터
시작되고
한 송이 장미는
기름냄새 가득한
공장
(송종찬·시인, 1966-)


+ 장미를 사랑한 이유

꽃이었다고 여겨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고통이었다
슬픔이 깊으면 눈물이 된다
가시가 된다
눈물을 태워본 적이 있는가
한철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미
불꽃 심연
겹겹이 쌓인 꽃잎을 떼어내듯이
세월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처연히 옷을 벗는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마음도, 몸도 다 타버리고 난 후
하늘을 향해 공손히 모은 두 손
나는 장미를 사랑한다
(나호열·시인, 1953-)

  
+ 장미를 생각하며

우울한 날은
장미 한 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내어 울면
나의 눈물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 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장미차를 마시며

시 쓰는 후배가 인도에서 사왔다며 건넨 장미차
보랏빛 마른 장미들이 오글오글 도사리고 있다
잔뜩 오므린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건 연두 꽃판이다
아홉 번을 다녀갔어도 후배의 연애는 봉오리째
차마 열리지 못했는데, 그게 늘 쓴맛이었는데

찻물에 마른 장미를 아홉 송이를 띄운다
여름 직전 처음 꽃봉오리가 품었던 목마름은
따뜻한 물에도 좀체 녹아들지 못하고
보라 꽃잎에서 우러나온 첫 물은 연둣빛이다
피워보지 못한 저 무궁무진한 숨결
첫 물은 그 향기만을 마신다

어쩌다 아홉에 한 송이쯤은 활짝
오랜 물에서 꽃 피기도 하는데
인도밖에 갈 곳이 없었던 후배의 안간힘도
그렇게 무연히 피어났으면 싶었는데

붉게 피려던 순간 봉오리째 봉인해버린
보랏빛마저 다 우려내고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물먹은 꽃봉오리들
입에 넣고 적막히 씹어본다

보랏빛 멍을 향기로 남기는 제 몸 맛처럼
안으로 말린 모든 꽃은 쓰리라
채 피우지 못한 꽃일수록 그리 떫으리라
(정끝별·시인, 1964-)


+ 장미

나는 세상의 모든
장미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세월의 어느 모퉁이에서
한순간 눈에 쏙 들어왔지만

어느새 내 여린 살갗을
톡, 찌른 독한 가시

그 한 송이 장미를
나는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모든 별빛보다
더 많은 눈동자들 중에

남몰래 딱, 눈이 맞아
애증(愛憎)의 열차에 합승한

그 한 여자를
나는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