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 * Korea

폐사지 위로 부는 바람에… 어린 황후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yellowday 2014. 12. 13. 13:47

입력 : 2014.12.11 04:00

여주 명성황후 생가와 고달사지


	명성황후 폐사지
모든 폐사지가 그러하듯, 고달사지는 쓸쓸했다. 같은 여주 땅에서 태어난 명성황후 민자영도 쓸쓸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 24-70mm 렌즈, 셔터스피드=1/500초, 조리개=f2.8, 화이트밸런스=흐림

이 겨울날, 경기도 여주로 간다. 단풍은 일찌감치 사라졌고 길가 낙엽도 사라지는 이 쓸쓸한 계절,

그 쓸쓸함 속으로 뛰어들어본다. 쓸쓸한 소녀와 쓸쓸한 사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명성황후 생가

민자영은 쓸쓸한 여자다. 1851년에 태어나 마흔넷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여자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녀를

명성황후라 부른다. 여주는 그녀가 태어난 땅이다. 황후가 아니라 홀어머니와 함께 살며 집안을 걱정하고 훗날 아들을

걱정하고 남편을 걱정하다가 비극적으로 죽은 여자, 민자영이다.

영동고속도로 여주IC에서 나와 우회전하면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이정표가 나온다. 163년 전 민자영이 태어난 집이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자영은 어머니와 함께 한양 친척 집으로 이사를 간다.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생가

나이 열여섯에 민자영은 한 살 연하인 전주 이씨 명복과 혼례를 치렀다. 시아버지 이름은 이하응, 흥선대원군이다. 남편은 훗날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된 조선 26대 왕 고종이다. 아비 없고 형제 없는 외톨이 계집아이. 대원군이 자영을 맞이한 이유였다.

하지만 아들 고종은 이미 한 궁녀를 사랑했고, 아들까지 태어났다. 시아버지는 이 손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고,

왕비는 질투와 배신감에 휩싸인다. 허울 좋은 사랑, 허울 좋은 왕비. 세자 책봉은 무산됐지만,

남편은 남편대로 시아버지는 시아버지대로 왕비를 냉대했다.

세월이 갔다. 아들이 두 번 태어났다. 병약한 손자들에게 시아버지가 명약을 처방해줬다. 모두 죽었다. 어미는 더욱 시아버지와

반목했다. 권세가들을 모두 남편과 자기 주위로 끌어들이면서 시아버지를 몰아붙였다. 1873년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에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고 아버지를 권력에서 몰아냈다. 민자영이 궁에 들어간 지 7년 만이었다. 이후 벌어진 권력투쟁 속에서

왕후 민씨는 남정네들에게 너무나도 큰 여인이 되어 있었다.

1895년 을미년 음력 8월 20일, 운명의 새벽이 왔다. 그 새벽, 일본 정부 지시로 경복궁에 있는 왕실의 거처 건천궁에 깡패들이 난입했다.

깡패들은 이를 여우사냥이라 불렀다. 그렇게 소녀 민자영은 불꽃 같은 44년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 아니 여자 민자영의 뒷이야기다.

소녀 민자영의 흔적은 여주에 남아 있다. 생가는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겨울바람 부는 너른 땅에 기와집이

여러 채 서 있고, 한쪽에는 기념관이 서 있다. 안채 마루에 황후 영정과 병풍이 놓여 있다. 옆에는 서울에서 옮겨온 집 감고당이 있다.

고향을 떠난 소녀 자영이 왕비가 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조닷

그녀가 책을 읽었던 별당 자리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비각이 서 있다. 비석 뒤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拜手飮涕敬書'. '두 손을 조아리고 눈물을 삼키며 받들어 쓰다'. 살아남은 아들 순종이 썼다고 전한다. 기념관에서는 민자영의 글씨 하나가 눈에 띈다. 시원하게 획을 그은 두 글자는 '玉壺'(옥호). 시해당한 그 새벽 잠자리에 들었던 내실 이름이 옥호루다. 거친 궁궐 속에서 그녀가 평화를 누렸던 공간이었기에 스스로 대견하게 남긴 글씨라고 짐작해 본다.

	[박종인의 眞景山水] 폐사지 위로 부는 바람에… 어린 황후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쓸쓸한 고달사지

쓸쓸한 여인을 뒤로하고 고달사지(高達寺址)로 간다. 스스로를 서언(誓言) 속에 가뒀던 쓸쓸한 사내 고달이 만든 절이다. 통일신라시대인 764년 고달이라는 사내가 이 너른 절에 있는 석물들을 깎고서 스님이 되었다. 절은 문을 닫았고, 고달이 만든 석물들도 모가 닳아 함께 바람을 맞는다.

모든 폐사지가 그렇듯 고달사지는 쓸쓸했다. 다 사라지고 석물만 남아 있다. 휑한 바람이 고달사지 벌판을 가득 메웠다. 부처님 사라진 좌대 주위에는 누군가가 탑돌이를 하고 간 흔적이 확연하다. 비석도 부서졌지만 그 옛날 위풍당당한 자태는 여전하다. 세월이 켜켜이 누적되면서 오히려 더 명징하게 드러나는 진정이 있는 법이다. 석양을 바라보는 잘생긴 귀부상 눈망울도 쓸쓸하고 나뒹구는 돌멩이들에도 쓸쓸함이 묻어 있다. 귀부만 남아 있던 원종대사탑비(元宗大師塔碑)는 최근 비석이 복원됐다.

◇목아박물관과 여주온천

쓸쓸함 뒤에는 여유를 찾기로 한다. 여주에 있는 목아박물관은 전통 목조각과 불교 미술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목조각장 목아 박찬수의 작품과 불교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야외에 있는 석물들도 볼만하다. 찰흙공예, 부채, 나무공예 같은 어린이 체험프로그램도 있다. 입장료 5000원. (031)885-9952, www.moka.or.kr 나들이를 끝내면 여주온천으로 간다. 강원도 접경 삿갓봉 꼭대기에 있는 온천이다. 노천탕도 있으니, 눈이라도 내린 주말이면 설경을 감상하면서 피로를 풀어본다. 7000원. (031)855-4800, www.yeojuspa.co.kr, 수요일 휴무.

촬영정보1. 화이트밸런스를 '흐림'으로 해보자. 전반적으로 누런 석양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2. 귀부상이든 석좌든 프레임 한가운데에 놓으면 사진이 밋밋해진다. 반드시 한쪽으로 치우치도록 구도를 잡는다.3. 명성황후 생가는 '수평 수직'이 생명이다. 한옥의 직선이 삐딱해지면 아주 어색한 사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