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 * Korea

말없이 잠든 석상 위로 흐르는 별… 남도(南道)의 신비로운 땅 화순

yellowday 2014. 11. 27. 13:21

입력 : 2014.11.27 04:00

신비를 품은 땅, 화순


	[박종인의 眞景山水]
운주사 와불 위로 별들이 흘러갔다. 오른쪽 위에 움직이지 않는 별은 북극성이다. 많은 사람은 운주사 석물들이 천체와 관계가 깊다고 믿는다. 24-70㎜ 렌즈, 셔터 스피드 30~60초, 조리개 f9.0, 감도 ISO200으로 9장 찍어서 합성했다. 와불은 휴대전화 플래시로 15초 비췄다.

전남 화순은 대도시 광주에 붙어 있어 남도(南道) 여타 여행지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최근 동복호에 숨어 있던 이서적벽이 30년 만에 개방되면서 화순은 일약 여행계 스타덤에 올랐다. "적벽만으로 1년은 먹고 살겠다"고 화순군청 사람들이 말할 정도다. 올해 방문객 예약은 끝났고, 그나마 내년 봄까지 적벽 투어는 폐쇄된다. 그러면 올해 화순 여행은 끝났다? 천만의 말씀이다. 화순은 신비로운 땅이다.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는 숨어 있는 화순 이야기.

#미스터리 1. 운주사
 

천불천탑을 하룻밤 만에 쌓은 절이라는 전설이 있다. 창건부터 폐사까지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는 운주사 이야기다.

서산(西山) 언덕에 있는 와불(臥佛) 한 쌍은 그 전설에 신비감을 더한다. 그 어느 고고학자도 근원을 명쾌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최근 운주사가 불교 유적이 아니라 도교 유적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화순군과 함께 화순 일대 역사 유적을

연구하는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박사는 "운주사는 불교 사찰이 아니라 도교 사원이었다"고 주장한다. 주된 내용은 이렇다.

"불상·보살상은 지위와 진리를 상징하는 손가락 동작(수인·手印)이 있다. 경전을 모르는 중생들이 깨달음을 직접 익힐 수 있도록

하는 표현이다. 운주사에 있는 석상들은 하나같이 손을 소매 속으로 감추고 있다. 수인은 감춰지면 무의미하다. 운주사 석상들은

불상이 아니라 사원의 무인상이다." 실제로 보면 운주사 석상들은 옛 무덤 앞 문·무신상처럼 길게 늘어뜨린 소매 속으로 손을 감추고 있다.

석탑들도 전통 양식과 다르다. 서산 초입에 있는 칠성바위가 북두칠성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정설이다. 탑들의 배치 또한 북두칠성 일곱 별과 유사하다. 그 꼭대기에 와불이 있다. 최석호 박사는 "탑들에 새겨진 기하학 문양 또한 천문학적인 상징이고 와불 또한 불상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도교 무사상"이라며 "여러 증거를 보면 운주사는 13세기 도교 사원을 건설 중이던 이 지방 호족들을 경계해 무신 정권이 공사를 중단시킨 미완의 사원"이라고 했다. 물론 주류 사학계와 불교계는 이 주장에 반대한다. 최 박사는 "그렇다면 미스터리라고 놔두지 말고 불교 사원임을 입증해달라"고 했다. 초저녁 운주사에 가본다. 불상이 되었든 무사상이 되었든 개의치 않는다. 누워 있는 석상 위로 별이 흐르고, 겨울 하늘은 짙푸르다.


	[박종인의 眞景山水]
고려로 망명한 주자의 증손자 주잠의 무덤.

#미스터리 2. 주자묘(朱子廟)

주잠(朱潛·1194~1260)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의 증손자다. 남송이 원나라에 항복하매, 1212년 주잠은 한림원 학자 일곱 명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 나주 땅에 망명했다. 원이 송나라 학자들을 찾아 고려 땅을 이 잡듯 뒤지자 주잠은 이름을 바꾸고 화순으로 은둔해 그곳에서 죽었다.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다. 주잠은 이웃 마을 구씨 가문과 통혼을 하니, '주야장천'의 잘못이라는 '주구장창'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 주잠의 무덤이 화순에 있다. 최근 주자를 모신 주자묘(朱子廟)가 무덤 옆에 세워졌다. 공식 사서는 1290년 고려 학자 안향이 이 땅에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하지만 주씨 가문은 이에 앞서 주잠과 그 제자들이 성리학을 가져와 전파했다고 믿는다.

한적한 시골길을 들어가면 산자락에 큰 한옥이 보인다. 주자묘다. 주자 동상을 지나 왼편 언덕에는 주잠의 무덤이 있다. 무덤 오른편에는 사적비가 있다. 사적지는 전 국무총리 이홍구가 썼다. 이홍구는 주씨 가문 외손이다. 33세손 주호영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다.

#미스터리 3. 서인(西人)의 순례지 화순

연산군을 폐위하고 왕이 된 중종은 젊은 학자 정암 조광조를 중용했다. 조광조의 혁신 정치에 반발한 보수파는 조광조에게 반역죄를 씌워 유배시켰다. 기묘사화다. 유배 한 달 닷새 만에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서른두 살이었다. 조광조는 "관은 얇게 만들어 운구하기 쉽게 하라"고 했다. 그곳이 화순이다. 그가 유배당했던 곳에는 비석과 사당이 서 있다.

이후 그의 도학 정치를 이상시한 사림 학자들이 화순을 수시로 찾았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 시신을 수습해 가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 화순으로 낙향해 서재를 짓고 제자를 길렀다. 그 서재가 학포당이다. 훗날 조광조 가묘가 있던 자리에 두 사람을 기리는 죽수서원이 건립됐다. 신재 최산두도 기묘사화로 화순으로 유배된 사람이다. 조광조보다 성균관 2년 선배인 최산두는 유배 생활 중 동복호에서 아름다운 절벽을 보고 적벽이라 이름 붙였다. 그게 지금 화순 이서적벽이다.

적벽을 마주 보는 망미정(望美亭), 이양면에 있는 송석정(松石亭)에서도 도학을 따르는 사림의 전통을 읽을 수 있다. 망미정은 병자호란 의병장 정지준이 지었다. 현판은 김대중 전 대통령 글씨인데 도난당했다. 송석정은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한 양인용의 정자다. 물염정(勿染亭) 또한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한 송정순이 세운 정자다. 이곳 또한 훗날 서인 학자들이 즐겨 찾았다. 실학자 홍대용은 물염정에서 실학자 나경적과 토론 끝에 혼천의를 만들었다.

풍광도 수려하거니와 이곳 정자에 남아 있는 시액(詩額·시를 새긴 액자)들은 세월을 초월한 사림 학자들의 작품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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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역자들을 멀고먼 남도 화순 땅으로 집합시켰는지는 알지 못한다. 왜 운주사 석상은 아직 일어서지 못했는지 수수께끼다. 왜 주자의 증손이 바다를 건너 동천(東遷)했는지 연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이곳, 남도 평화로운 땅 화순에서 벌어진 사실은 틀림없다. 겨울로 가는 길목, 우리가 화순에 가야 하는 이유다.


	 [박종인의 眞景山水]

1.미스터리 여행 추천 코스(모두 내비게이션 키워드) 운주사→조광조 유배지→송석정→죽수서원→주자묘→임대정→만연산 드라이브

2.임대정 고종 때 병조 참판을 지낸 민주현이 지은 정자와 정원. 낙엽 가득한 연못

3.만연산 드라이브 화순읍내 신기교차로에서 수만리 방향. 스위스 알프스를 연상시키는 드라이브

4.별미 ①빛고을회관: 6500원짜리 청국장백반 강력 추천. (061)372-1173 능주면 석고리 314 ②금막동갈비: 돼지생갈비 1인분 1만2000원, 돌판비빔밥 6500원. 374-8892 화순읍 만연로 66-8 ③사평다슬기수제비: 다슬기 수제비 8000원, 닭백숙(두 시간 전 예약요) 5만원. 372-6004 화순읍 삼천리 815-2

5.숙박 인터넷에서 '도곡온천타운' 검색

6.화순군청 www.hwasun.go.kr
, 문화관광과 (061)379-3178


	 [박종인의 眞景山水]

11월 13일자 주말매거진 C4면 '박종인의 진경산수' 메인 사진에 등장한 분들을 찾습니다. 11월 7일 금요일 오후 2~3시쯤 강원도 원주 반계리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사진에 찍히지 않았더라도 현장에 계셨던 분들은 모두 연락을 주십시오. 사진 속 가족분들, 함께 오셨던 커플, 혼자 오셨던 여성분 모두 인화한 사진을 기념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seno@chosun.com으로 메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