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졌던 여성농악, 국립극장 올라]
1979년 해체 후 본격 복원 무대… 3년 합숙, 옛 단원에게 전수받아
채상소고춤 김운태씨도 함께 서
- 김운태의 자반뒤집기. /PRM커뮤니케이션 제공
말하자면, 그들은 전통 가무(歌舞)가 낳은 마지막 걸그룹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지 4년 뒤인 1957년, 남원국악원은 희한한 아이디어를 냈다. "큰애기(처녀)들로 농악단을 만들어 보자!"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여성국극에서 힌트를 얻은 것. 돈 벌기 위해 도회로 나가 식모살이하기 일쑤였던
15~20세의 농촌 여성들에게 당대 농악의 정수(精髓)가 전수되기 시작했다.
반응이 괜찮았다. '춘향' '전북' '호남' 등의 접두사가 붙은 여성농악단이 곳곳에서 만들어져 1960~70년대 한 시절을 풍미했다.
처자들은 말뚝과 광목 포장 실은 도라꾸(트럭)에 함께 올라타, 새벽이슬 맞으며 황토먼지 이는 들길을 떠돌았다.
그 마지막을 장식한 단체가 '호남여성농악단'이었다. 검도와 당수가 도합 10단이었으며 '호남오도바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김칠선(金七善·1926~1979)이 이들을 이끌었다. 장거리나 축제를 가리지 않고 한번 포장을 치면 열흘을 머물며 하루에
3~10회 공연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 김일의 박치기와 차범근의 축구를 보러 TV 앞으로 몰렸다.
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1979년 말, 이들은 마침내 해체됐고 곧 잊혔다.
- 18~21일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연희단 팔산대의 판굿 공연 모습. 이들의 춤은 호남우도농악을 계승했다. /PRM커뮤니케이션 제공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는 채상소고춤의 명인 김운태(51)는 김칠선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비 새는 포장극장을 따라
떠돌며 여성농악단과 한솥밥을 먹었다. 1995년 대학로에 서울두레극장을 세우고 아주머니가 된 단원들을 모아 연습을 시켰다.
당시 이 광경을 본 전통예술 연출가 진옥섭의 회상. "솔직히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구를 '떵!' 하고 치는 순간,
이건 공이 울리자마자 링으로 뛰어나가는 인파이터 복서였다." '예술'이란 치장보다 '밥'에 대한 단순한 몰두가 이룬
순수한 힘이었고, 박수가 곧 밥이었던 유랑패들이 보여준 군살 없는 판굿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호남우도농악의 계승자다. 상쇠의 부포(벙거지 꼭대기에 달린 물건)와 장구의 춤 맵시, 소고꾼들의 기민한 기예가
조화를 이루는 농악의 백미였다. 진옥섭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군무(群舞)"라고 말한다. 자기가 반주하는 음악에 맞춰
자기가 춤을 추는 것,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반주 소리에 맞춰 춤추는 '궁극의 춤'이라는 얘기다. "그 작렬하는 장구 소리 위에
피어오른 부포꽃이 전후좌우로 쩍! 쩍! 찍어댈 때, 관객의 심금이 가뭄의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질 것이다."
오랜 세월 까마득히 잊혔던 이 '비밀결사와도 같은 춤'을 복원하는 무대가 마련된다. 국립극장과 연희단 팔산대가 공동주최하는
'무풍(舞風)'이다. 2011년 경기도 일산에서 창단한 연희단 팔산대는 판소리·무용·기악을 두루 전공한 젊은 여성들이 모인 단체.
3년 동안 합숙하면서 호흡을 맞췄고, 김운태와 옛 호남여성농악단 단원으로부터 마지막 실전(實戰)의 비기(秘技)를 전수받았다.
2012년 여수엑스포 전통마당에서 93일 동안 하루 평균 4회 공연하며 팔산대 열풍을 일으켰으며, 일본·영국·스페인·터키·프랑스에서
공연해 찬사를 받았다. 연희단 팔산대의 '무풍' 공연에는 김운태와 일부 옛 단원이 함께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