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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잣집과 자유시장경제 (베풂의 미학 - 무엇이 진정한 베풂의 기반인가?)

yellowday 2014. 7. 6.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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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 부잣집의 300년간의 베풂


세월호 참사 두 달이 지난 6월 15일 현재 ‘안전성금’이 1,016억 원이나 모아졌다. 이 가운데 기업 성금은 903억 원, 개인 성금은 113억 원에 이른다. 안전성금은 ‘사회 안전시스템’ 구축을 위해 쓰일 것으로 얘기된다. 기업은 지난 5월 20일 경제5단체 회장단회의에서 결정된 후 삼성 150억 원, 현대 100억 원 등 많은 대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개인은 연예계, 스포츠계 등 수입이 많은 스타들이 역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개인 성금 가운데 20대 중반인 한 연예계 스타가 3억 원을 기부했는데, 이를 놓고 필자는 ‘무엇이 진정한 베풂의 기반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진정한 베풂의 기반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나니 대답은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로 향한다.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란, 신라 말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1568~1636)과 그의 아들 최동량이 부의 터를 닦고, 손자 최국선(1631~1682)이 부를 일군 후 그로부터 28세 손인 최준(1884~1970)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 동안 이어져 온 부에 관한 이야기다.1) 세계 역사를 통해 최 부잣집처럼 300년 동안 부를 이어 온 경우는 그 유례가 없다고 한다. 르네쌍스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은 15세기 초에 시작하여 약 200년 동안 부와 권세를 누려 왔다. 그런데 경주 최 부잣집의 부는 17세기 초에 시작하여 300년 동안이나 이어오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베풀었다. 최 부잣집 300년 부가 마감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최 부잣집 마지막 대 최준이 엄청난 부를 독립 운동과 교육 사업에 썼고, 다른 하나는 가구당 농지면적을 3정보 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이승만 정부가 1949년에 농지개혁법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경주 최 부잣집은 어떻게 부를 일궜는가? 최 씨 가문을 부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은 최국선이다. 최국선은 선조들의 유훈(遺訓)을 잘 받들면서 농사일에 전념했다. 그는 당시 한발이 심하면 실패하기 때문에 나라가 금한 벼의 이앙법(移秧法)을 도입했다. 최국선은 아버지가 수리 시설을 잘 갖춰 놓았으므로 이앙법을 도입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고 한다. 농사일에 전념하고, 농사 기법을 개발하여 최국선은 만석꾼이 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은 어떻게 베풀었는가? 최 부잣집의 베풂을 이야기하려면 대대로 이어져온 여섯 가지 가훈(家訓)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 가운데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가 베풂의 기반이 되었다. 최국선의 나이 40살인 1671년 삼남(三南)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 때 최국선은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모든 사람들이 장차 굶어 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곳간을 헐어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그리고는 집 앞의 큰 바깥마당에 큰 솥을 걸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날마다 죽을 끓이도록 했다. 죽을 쑤어 나누어 주던 그 자리가 활인당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여섯째 가훈은 바로 이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최 부잣집은 농민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소작료를 줄여주고, 성종 때 어느 춘궁기(春窮期)에는 한 달에 100석의 쌀을 나누어 준 적도 있다. 이 외에도 선행은 수없이 많다. 이렇듯 최 부잣집은 사방 백리 안의 사람들을 이웃으로 보고 이들을 도왔다.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는 ‘무엇이 진정한 베풂의 기반인가?’에 대한 답을 준다. 답은 ‘부, 곧 경제력’과 ‘베풀고 싶은 마음’이다.

1880년대 이후 자유시장 국가 미국은 베풂의 온상(溫床)

미국은 처음부터 시장경제로 출발한 나라다. 미국은 1620년 영국에서 메이플라워(Mayflower)를 타고 건너간 102명의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다. 미국은 이민 초기에는 촌락공동체인 타운제도(town system)를 실시했는데, 인구가 늘어나자 1624년에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경작지 1에이커씩이 분배되었고, 1626년에는 각 호마다 20에이커씩이 분배되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토지가 계속 분배되어 갔고, 결국에는 토지의 사적소유를 통해 시장경제의 핵심 원리인 사적소유제도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미국은 1776년 13개 주(州)가 연합하여 독립한 나라다. 건국 초기 미국을 지배한 사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이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여서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 사상이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다. 이 사상은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문의 첫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man is born equal.).”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은 1861∼5년간에 일어난 남북전쟁 후 ‘기회의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뀌어갔다. 밀튼 프리드먼은 ‘기회의 평등’을 ‘능력에 따라 열려지는 인생’으로 풀이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남북전쟁 이후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가치체계에서 기회의 평등이 최우선을 차지했는데 이는 특히 경제정책에서 명백히 나타났다. 그 슬로건은 자유기업, 경쟁, 자유방임이었다. 거래에서 상대편이 동의하는 한 누구나 기업설립, 직업선택, 재산취득에서 자유로웠다. 누구나 성공하면 이익을 얻고, 실패하면 손해를 보게 되었다. … 가문이나 종교나 국적이 아닌 성과만이 시금석(試金石)이었다.”2)   

‘기회의 평등’ 가치관을 바탕으로 경제가 폭발적으로 발전하자 미국은 베풂의 온상이 되어갔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에서는 수많은 자선활동이 쏟아져 나왔다. 이에 관해 밀튼 프리드먼은 이렇게 썼다.

“세기의 전환기에 시카고는 자가당착적 충동으로 들끓던 도시였다. 즉, 이 도시는 산업사회의 기본적인 상품을 취급하던 상업중심지인 동시에 문화향상이라는 바람에 휘말리고 있던 지역사회였다. …. 시카고의 문화향상운동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은 1880년대부터 1890년대 초반에 걸쳐 이 도시에 세워진 수많은 거대한 문화기관들(미술학교, 뉴베리도서관, 시카고교향악단, 시카고대학교, 휠드박물관, 크레라도서관)이다. …. 이러한 기관들은 이 도시에 나타난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러한 기관들을 건립하게 된 최초의 동기야 어떻든 간에, 그 기관들은 대체로 일단의 기업인들에 의해 조직되고 유지되고 관리되었다. …. 그러나 이 기관들은 개인적으로 후원되고 관리되기는 하였지만 시 전체를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이 기관들의 이사들은 개인적으로 심미적이거나 학술적인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문화적 자선활동에 착수했던 것이다.”3)   

자선활동은 결코 문화기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또 이러한 일은 시카고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 예로, 같은 시대에 제인 아담스에 의해 헐 하우스(Hull House)가 시카고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문화와 교육을 보급하고 이들의 일상 문제를 돕기 위해 전국적으로 설립된 수많은 복지회관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다. 병원이나 고아원이나 그 밖의 자선기관들이 같은 시대에 많이 설립되었다.

그러면 무엇이 1880년대 이후 미국으로 하여금 자선활동의 폭발을 가능하게 했는가? ‘경제력’이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가치관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는 부를 폭발적으로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기업, 경쟁, 자유방임이라는 자유시장 경제체제가 미국을 부유한 국가로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부가 사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활동으로 폭발적으로 발산된 것이다.  

베풂은 자유시장경제의 선물

베풂은 ‘경제력’과 ‘베풀고 싶은 마음’이 한 데 어울려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베풂은 ‘경제력’은 넘치되 ‘베풀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고, ‘베풀고 싶은 마음’은 넘치되 ‘경제력’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베풂의 대표적인 경우는 아마도 성경 속의 과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예수는 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누가복음 21: 3-4)

우리는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 살고 있다. 사회주의가 자유시장보다 못한 이유의 하나는 베풂은 사회주의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사적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베풀고 싶은 마음’은 넘치되 ‘경제력’이 없어서 베풂이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주의에서는 국가가 국민의 의식주를 관리하기 때문에 베풂이 이루어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18대 대선에서 ‘경제민주화’ 이슈를 내세워 대한민국을 한 때 소란스럽게 만든 김종인 씨가 2014년 6월 말경 한 야당 인사들을 앞에 놓고 벌인 강연 내용이 TV에 소개되었다. 내용의 핵심은 ‘정치가 대기업을 잘 다스려야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성장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기업을 잡는 것’이 경제민주화라는 그의 주장에 익숙해 있는 터라 그의 강연 내용을 한 쪽 귀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글의 시작에서 언급했듯이, “세월호 참사 두 달이 지난 6월 15일 현재 ‘안전성금’이 1,016억 원이나 모아졌고, 이 가운데 기업 성금이 903억 원”이나 된다는 점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에서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면 ‘기업 성금 903억 원’이 모아지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노력과 경쟁을 통해 부를 쌓는 한국의 기업, 특히 대기업과 부자를 홀대(忽待)하는 정서는 한국 사회에서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 베풂은 기업과 부자를 통해 계속 이어질 테니까.  whek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