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宋象賢, 1551년 ~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이며 임진왜란 때의 장수이다.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과 교전하다가 패전 살해되었다.
왜적은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자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한천(寒泉)이며
동래부 순절도
생애
전라북도 정읍군,현 정읍시에 태어나,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10여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면서 문장을 떨쳤고 사계 김장생과 우의를 맺었다.[1]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으며, 다음해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1579년 박사(博士)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외직에 나가 유학을 진작시켰다. 1583년 사헌부지평으로 들어와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공조좌랑과 군자감(軍資監)의 정(正) 등을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 집의, 사간과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년)에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임지에 도착하여 방비를 굳게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다음날(음력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 하자 이때 부사인 그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했다.
사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항전했으나 함락되게 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의연함에 감동한 적장 중의 한 사람은 그가 죽은 뒤 시(詩)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사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제향되었다.
1595년 선조 28년에 묘소를 청주로 이장하고 충신문을 세웠으며, 1610년 광해군 2년에 사당 동래부사송상현충렬사
(東萊府使宋象賢忠烈祠)을 창건하였다. 1742년 영조 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기념하여, 송상현 장군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곳에 송공단을 만들었으며, 매년 음력 4월 15일에 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동래 충렬사에서도 동래성 전투와 부산진성 전투 등 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여러 사람들을 모시고 있다.
또, 황해도 개성 숭절사(崇節祠), 청주 상당구 용정동 신항서원(莘巷書院)과 흥덕구 수의동 충렬사(忠烈祠),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정충사(旌忠祠), 함경북도 경성(鏡城) 화곡서원(禾谷書院) 등에 제향되어 있다. 위키
* 충렬공 송상현선생 동상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송공삼거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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