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닥종이 김영희의 마지막 남자, 디자이너 배용

yellowday 2014. 4. 16. 09:05

입력 : 2014.04.15 17:34

백발이 근사한 일흔의 노장 디자이너를 만났다. 데뷔 44년,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는 얼마 전 패션쇼가 아닌 패션전을 열어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독일에서 활동하는 닥종이 김영희 작가의 연인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그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조금 더 뜨거워졌다. 


	패션계에서 한국의 발렌티노로 불리는 배용 디자이너.


부산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이번 시즌 컬렉션을 보여주는데, 쇼가 아닌 전시를 선택했단다. 패션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화려한 모델들의 쇼가 아닌 정적인 전시로 보여주는 것은 국내에서는 아직은 생소한 일. 이제 갓 패션에 입문한 젊은 디자이너의 패기가 아니라 일흔을 훌쩍 넘긴 1세대 디자이너의 행보라는 점이 더욱 흥미로웠다.

“매 시즌 살롱쇼와 패션쇼를 열었는데 이런 시도는 처음이었어요. 2014년 의상과 기존의 제 스타일을 위주로 연출했습니다. 새로 생긴 갤러리의 공간과 잘 어우러지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패션계에서 한국의 발렌티노로 불리는 배용 디자이너는 일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정상 그의 근거지인 부산이 아닌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지만, 그에게서 전시회의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 쇼가 아닌 전시 

“고작 이틀간의 전시였지만 성공적이고 재미있게 잘 치렀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고, 저도 만족스러웠고요. 디자이너는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늘 있게 마련이잖아요. 지나가는 이미지가 아닌 옷의 영속성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의 매력이 있습니다.”

지난 1971년에 데뷔한 이래, 하루도 쉬지 않고 디자이너로서의 삶에 충실한 그다. 늘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작업은 고단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가 평생을 디자이너로 살아온 힘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시라는 새로운 도전은 디자이너로서의 당연한 시도다. 새로운 시즌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것은 쇼와 다름이 없지만, 작업실의 구현이나 평생 동안 모아온 골동품을 활용한 전시, 오프닝 파티에 참가한 모델 등은 전시라는 타이틀을 입었기에 가능했던 시도다.

“배용은 비비드 스타일이라는 콘셉트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저의 시그너처인 비비드는 당연히 선보였고, 새로운 시도로는 무채색의 비중을 늘렸습니다. 전시라는 정적인 타이틀에서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고민을 했어요.”

평생 동안 전 세계를 돌며 모아온 골동품 다리미들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일반인에게는 별 의미 없는 물건일 수도 있지만, 디자이너에게 다리미는 패션의 흐름까지 읽게 도와주는 소중한 오브제다.

“그렇다고 정적으로만 꾸민 것은 아니에요. 실제 모델 두 명을 섭외해서 제 옷을 입혔습니다. 깜짝 이벤트 차원에서 마련한 거예요.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틈에서 자유롭게 다니도록 했는데, 제 옷을 입고 있으니까 모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신 분들도 있고 아닌 분들도 있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요소요소에 재미를 주면서 전시를 만들었어요.”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디자이너로서 좋은 영감을 많이 받았다. 앞으로도 패션쇼, 살롱쇼 등 다양한 형태로 작업해나가겠지만 전시 역시 꾸준하게 시도해서 영역을 만들어나갈 생각이다.


가장 친한 사람, 닥종이 작가 김영희

최근 그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독일에 거주하면서 닥종이 인형을 만드는 김영희 작가다. 전시회를 열고 책을 출간하는 등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김영희 작가는 공공연하게 ‘동갑내기 남자 친구’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그 동갑내기 남자 친구가 바로 디자이너 배용이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두 사람은 4년째 좋은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자녀들이 모두 출가할 정도로 각자의 인생을 마무리할 시점에 새롭게 피어난 사랑이라는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다.


	소향갤러리에서 열렸던 2014 F/W 시즌 제품 전시회에 연인 김영희 작가가 함께 자리를 빛냈다.
소향갤러리에서 열렸던 2014 F/W 시즌 제품 전시회에 연인 김영희 작가가 함께 자리를 빛냈다.

1942년,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부산과 뮌헨이라는 물리적인 거리를 초월해 우정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의미는 이미 그것을 초월하는 관계다. 이번 전시 역시 김영희 작가의 조언에서 출발한 일이다.

“그 친구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패션 디자이너 아제딘 알라이아의 전시회를 보여줬어요. 그걸 보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전시가 열리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녀가 한번 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워주더라고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신선한 일은 아니다’라며 쑥스러운 반응을 보이던 배용 디자이너는 이내 여자 친구 김영희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네 자녀를 키우고 사별한 그는 늦게 만난 새로운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전시 며칠 전에 부산에 왔어요. 전시 오픈하기 전에 보고 싶어 하더라고요.  원래 제일 가까운 사람이 궁금해하고 걱정도 하잖아요. 또 특별한 사이에서는 그런 게 필요하기도 하고. 그런데 저는 완벽하게 준비해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시 오픈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죠. 본인도 전시를 하는 사람이니까 잘 이해를 해주더라고요.”

황혼에 시작된 사랑에 서툰 감정 소모는 낄 틈이 없다. 지구 반대편에 살면서 전혀 다른 일을 하는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의 작품에 영감과 자극을 주는 최고의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일흔의 동갑내기 연인이 좋은 이유

세월은 사람에게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정확하고 깊은 안목을 선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각자의 삶을 만들어온 두 사람은 일흔이 다 되어서도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 동안 자기만의 우주를 충실하게 만들어온 그들은 서로를 알아봤다. 그 나이에 무슨 사랑이냐는, 사람들의 부러움 반 진심 반의 조언은 익숙한 일이다.

“그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좋아요. 만나면 즐거워요. 대화가 잘 통하고, 지식이 풍부하고요. 본인의 직업을 가지고 있고, 자기 분야가 확실한 사람이잖아요. 서로 다른 분야지만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사이다. 파트너로서 아주 좋은 관계다. 이번 전시처럼, 또 김영희 작가의 ‘옷 만드는 아이’처럼 서로에게 영감이 되어 좋은 결과물이 창출되는 경우가 꽤 많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도 많이 듣는다. 한 작곡가 지인은 좋은 영감을 받았다면서, 작품을 만들어도 되겠냐고 묻기도 했단다. 쑥스럽기도 하지만 연인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 사람은 뮌헨에 있고, 저는 부산에 있으니까 자주 만나지 못하잖아요.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예요. 서로 한 번씩 오가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요. 이번에는 제가 전시를 해서 그 사람이 부산에 와서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노년의 사랑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함께 좋은 곳에 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여행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한국의 시골, 소도시를 다니면서 소소한 추억을 쌓아간다.

“부산 근처에 있는 마산이나 포항 등 가까운 곳에 좋은 곳이 많아요. 맛있는 것도 먹고 또 한국의 멋도 느끼고 그렇게 시간을 보냅니다.”

누구나 상상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경험하는 것은 아닌 황혼의 사랑은 이렇게 평화롭게 흘러가는 중이다.


	패션계에서 한국의 발렌티노로 불리는 배용 디자이너.

죽을 때까지 작업하는 디자이너 될 것 

모델 장윤주가 최근 본인의 SNS에 배용 디자이너에 대한 글을 올려서 화제가 됐다. 처음 쇼에 오르던 초창기 시절, 본인을 오프닝 무대에 세워줬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디자이너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작업이 많았어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죠.(웃음) 장윤주, 박영선 등 눈에 띄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어요. 지금이랑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죠.”

44년을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도파 백화점의 2층 멤버였던 그는 한국 패션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모델들뿐 아니라 패션의 흐름을 모두 지켜봤다.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 오픈 멤버이기도 해요. 그땐 해외 명품이 아니라 국내 명품 디자이너 브랜드가 주였으니까요. 이후에 해외 명품이 들어오면서 청담동 숍들이 생기고 명품 거리가 조성됐죠. 지금은 그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지요.”

환경적인 요소는 많이 달라졌지만, 노장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는 식상하지 않은 스타일을 꾸준하게 보여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평생 한길을 걸었지만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보고 싶어요. ‘이제 좀 할 것 같은데?’라는 기분이 들거든요. 지나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직업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다른 건 할 수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할 수 있는 한 계속하고 싶어요. 언제까지 하겠다는 결정은 없어요.”

그는 동년배에 비해 스타일이 좋고 훤칠한 모습이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황혼의 사랑도 담담하고 현명하게 받아들이고, 본인이 해야 할 일도 잘해내고 있는 그야말로 이 시대가 가장 추구하는 인간상이 아닐까 싶다.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