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11 14:32 | 수정 : 2014.03.11 15:43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7년간의 준비 끝에 오는 21일 문을 연다.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개관에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 동대문운동장이었고, 그전에는 서울운동장, 경성운동장이었다.(이하 '동대문운동장'으로 통일)
1925년 10월15일 세워진 동대문운동장은 일제가 일왕의 결혼을 기념하며 서울 한복판에 건립한 스포츠 시설이다.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체육시설인 이곳은 2003년 폐장 전까지 다양한 스포츠 경기가 열렸고 많은 이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동대문운동장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 과거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던 동대문운동장의 모습.
동대문운동장 준공 열흘 뒤 일제는 개장 이벤트로 '조선신궁봉찬경기대회(朝鮮神宮奉贊競技大會)'를 연다. 이름부터 발칙한 이 대회는 민족진영이 거부해 반쪽 행사에 그친다. 하지만 이듬해 축구장, 정구장이 완공되고 관중석이 정비되면서 동대문운동장은 서울의 명물이자 체육인의 보배로 발돋움한다.
때는 1928년 6월 8일. 연희전문 소속 이영민 선수가 타석에 서서 날아오는 공을 주시하다가 힘차게 공을 친다. 장외홈런. 이 소식에 전국이 들썩거렸다. 또 한국 축구의 모태인 경평전(京平戰)이 열리는 날이면 2만여 관객석은 잇달아 만원이었다. 경기 중 공이 골대 그물을 흔들 때 터져 나오던 함성은 일본 경찰(日警)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일제가 우민(愚民)정책을 위해 마련한 운동장이 민족 에너지의 분출구가 됐던 것이다.
광복 후 이곳은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군중집회 장소로 탈바꿈한다. 또 전국체육대회 장소로도 쓰인다. 1959년에는 부속야구장이 건립되면서 전국고교야구대회를 중심으로 아마추어 야구의 성지가 된다.
그러다 1984년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준비로 잠실운동장이 세워지면서 동대문운동장의 위상은 하락한다. 축구장은 2000년 마지막 경기를 치른 뒤 노점상들의 생계용 풍물시장으로 간판을 달리한다. 또 일부는 주차장으로 대체된다. 야구장 역시 2007년 서울시 고교야구 가을리그 결승전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지난해 별세한 원로 야구인 김양중(83)씨는 당시 인터뷰에서 "49년도 청룡기고교야구 결승전이 가장 기억나. 난 광주서중 투수로 결승에서 경남고 장태영군과 멋진 대결을 펼쳤고 결국 우승을 했지"라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 1925년 10월 15일 경성운동장 개막(위, 매일신보 10월 17일)과 연희전문 소속 이영민 선수(왼쪽 아래), 아마추어 야구의 성지가 됐던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오른쪽 아래) 모습.
운동장이 풍물시장과 주차장으로 전락해버리자 민간단체 동대문포럼은 서울시에 운동장을 공원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서울시는 이를 받아들이며 2002년 공원화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만들고 2005년 공원화 기본계획을 수립한다. 2006년 12월에는 아이디어 공모를 하고 이듬해 8월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안을 결정,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 건립을 시작하게 된다.
▲ 풍물시장(왼쪽)과 주차장(오른쪽)으로 전락해버린 동대문운동장의 모습.
반발도 심했다. 프로야구선수협회와 전국노점상총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들과 각계 인사들이 역사·문화적으로 가치가 큰 동대문운동장 철거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2008년 5월 14일 '굿바이 동대문 운동장'을 끝으로 동대문운동장은 82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허물어졌다.
그런데 4개월 뒤 갑자기 공사가 중단됐다. 일제가 동대문운동장 건립 당시 덮어버린 역사가 드러난 것이다. 당시 문화재 발굴의 키워드는 '서울의 재발견'이었다. 광화문 일대와 육조거리, 숭례문, 동대문운동장…. 파는 곳마다 마치 묻어둔 타임캡슐인 마냥 수백년전 모습들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 동대문운동장이 철거(위)되면서 드러난 역사의 터(아래).
이곳에서 문헌상으로만 존재하던 이간수문(二間水門)과 치성(雉城)이 발굴됐다. 또 왕궁 호위 정예부대 거처였던 하도감(下都監) 터를 비롯한 유구과 유물 2500여점도 함께 발굴됐다. 참고로 이간수문은 약 600년전 조성된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고 치성은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키며 적을 공격하던 방어 시설이다.
유구와 유물의 발굴로 DDP 공사는 2009년 3월까지 중단된다. 대대적으로 운동장 터에 대한 확장발굴조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곳에서는 서울성곽과 함께 조선시대와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등 여러 시기에 걸친 역사와 문화상, 건물지 및 무기제조 관련 생산유적, 연못지 등이 발굴됐다.
이간수문이 확인된 지역은 동대문 쪽 청계천에 인접한 저지대였다. 동대문운동장 건립 당시 일제는 흙을 이용해 지형적으로 낮은 수문 일대를 그대로 매몰했다고 한다.
▲ 복원된 이간수문의 모습.
이간수문과 더불어 많은 유구, 유물이 어찌나 깊게 매몰했는지 당시 발굴조사에 대한 문건에 따르면 '대규모 인원 및 굴삭기, 덤프 등이 투입되어 토목공사를 방불케 했다. 투입된 연인원은 조사단 2천명, 작업인부 1만3천여명에 이르며, 제토된 토사량은 약 10만㎥로 15톤 덤프트럭으로 약 1만대 분량에 해당된다'고 적혀있다.
모든 발굴과 이전복원 계획을 수립한 뒤 DDP 공사는 재개된다. 현재 발굴된 유물은 동대문역사관, 유구는 성곽 동측 4460㎡ 부지와 DDP 썬큰광장 914㎡ 부지에 이전복원 돼 있다. 또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역사와 유물 등은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다.
▲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동대문운동장의 과거 모습.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DDP 목표를 "사회 문화적 중심축을 창조해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유쾌함과 역동성을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간직한 터에 DDP가 들어섰고 개관을 앞두고 있다. 82년간 많은 이들의 애환이 서린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약 5천억이라는 세금과 7년의 세월을 들여세워 진 DDP. 그 현장을 방문해 역사를 되짚어 보는 건 어떨까.
▲ 오는 21일 동대문운동장 터에 개관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모습.
※ 관련정보
-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홈페이지 : http://www.ddp.or.kr/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홈페이지 : http://www.seouldesign.or.kr/park2/summary.jsp
※ 참고자료
- 월간지 공간(SPACE) 2013년 8월호 특집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처음 보는 새로운 풍경'
-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문화적 가치와 보존의 필요성(문화연대 황평우 저)
- 시서저널(2008년 12월 31일) '갑자기 귀해진 땅 밑 어찌 지키나'
- 매경일보(2009년 4월 28일) '환유의 풍경이 환유하는 것'
- 문화재청(2009년 10월 9일) '잃어버린 도성의 기억을 복원'
- 위키백과(http://ko.wikipedia.org/wiki/동대문운동장)
- 조선미디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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