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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버뮤다 삼각수역(三角水域)

yellowday 2014. 3. 12. 09:31

입력 : 2014.03.11 13:55

한국 현대사는 한자교육의 버뮤다 삼각수역이다. 일본의 문화는 칸지(漢字·한자)가 도구고 근간이다.

단순 숫자만 봐도 일본은 노벨문학상이나 과학 관련 수상자가 많다. 중국은 과학과 문학의 수상자가 모두 중국 국적이 아니다.

한국은 과학과 문학상을 받은 분이 아직 없다.

칸지는 일본에서 발생하지 않았지만, 과학, 기초소재, 문학적 인정을 받고 있는 오늘의 일본을 이룬 글자다. 칸지가 일본에서 쓰이고,

전하는 가치는 중국의 가치가 아닌 일본의 가치다. 그 역사적 가치도 고스란히 일본의 자산이고,

중국마저도 일본인의 근대 번역 문화 영향으로 일본식 번역어가 있다.

일본은 지리적 약점을 칸지를 통해 극복하였고, 지금도 다른 나라말로 만들어진 서적을 일본의 칸지로 번역해

과학과 문화 발전에 이루거나, 칸지로 된 문학 작품을 다른 나라말로 옮겨 노벨상을 2차례 받는다. 

 

컴퓨터 상에 1글자는 8bit의 저장 공간을 차지한다. 한자는 16bit의 저장공간이 요구된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제1 표준 칸지는

2,965자, 제2 표준 칸지를 3,390자를 지정하였고, 1990년에 보조한자를 5,801자를 정하였고, 제3, 4 표준 한자를 2000년도에

 제정했다고 한다. (webblio 전량 참조함). 

한국 사회의 한자음 표기는 정립되지 않았다. 신문 지면 내에서도 중국음 혹은 한국음으로 적기도 한다. 과거에 통용되던

과거의 한국식 발음도 뒤집기도 한다. 전통적인 비빔밥에 새 짬뽕을 섞는 일 같다. 발음의 가치에 대한 기준, 사상도 없다.

한자는 그저 중국만이 발음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어학적 깊이의 사고가 꽉 들어 찬 거 같다. 사회, 교육계, 학교, 방송,

언론에 90년대 후반부터 이런 경향이 퍼졌다.

어학 실력은 말 그대로 칼이고 도구에 불과하다. 그 칼을 써서 무엇인가를 해체, 통합하는 것은 벌써 수단의 영역을 넘는다.

한국사나 한국사가 쓰인 한자 전적은 어학 실력의 강소, 유무에 따르거나, 지금 이 순간 표준 중국어 발음의 대상이 어학 실력으로

진단하고, 강제하기에는 거대한 강역이다. 의사만큼 공부하고, 수련해 보고 덤빌 대상이다.

고구려, 신라 역사를 중국과 일본을 아우른 경지에서 조망해야 한다. 지금도 중국에서 일각의 목소리로 야금야금 나오고 있지만,

어떤 중국 정권의 실력자나 실권자가 향후에 아베처럼 노골적으로 역사-정치적으로 고대 한반도 역사에 대해 도발적인 발언을

작심하고 내뱉으면 그건 권투로 따지면 훅이다. 두개골에 한방 꽂히면 90도로 주저앉는다.

지리적 방향이 다르지만, 해양에서 불어오는 최근의 일본의 아베가 들고 흔드는 깃발의 바람도 그 저변적 기반의 집결로

중국도 우려를 표시하고, 뒷짐을 지고 있던 오바마 행정부도 뭔가 말리는 것 같은 분위기다. 대륙에서 정치적 기후가 변화돼

비슷하지만, 군사적 움직임까지 동반되면 그때는 위기다. 제2의 달라이라마가 한강을 건너올지 모를 일이다.

 

역설적으로 한국의 동북아에서의 고유한 특징을 구별하려면 한자의 사용은 칸지에 못지않게 당당히 한국어에 편입시켜야 한다.

고유의 문화를 담은 도자기 같은 자산이고,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영토를 지키고, 역사를 지키는 용병 역할을 충실히 시킬

국자가 당연히 아닌가? 한자의 언어 기능적 가치와 역사적으로 실용적인 소통의 가치, 그리고 현실적 각국 언어의 기간을 이루고 있는

현실적 가치를 수학적 집합 그림으로 바라보면 어떻겠는가. 한자를 교집합으로 인정하고 골똘히 보는 거다. 그렇게 되면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중국식 발음만이 정통이다는 말은 마치 모든 지역적 음성적 가치와 현실은 모두 없애고, 표준음만 남기자는 것처럼

이해가 불가능하고,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영어 발음도 표준 발음이라는 말이 무색해 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요새 미국식 발음이 최고라는 생각을 접게 되었다.

영어를 모두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이런 웃긴 머릿속에 품게 되었다. 아일랜드 소설가의 영어 소설을 읽는 데 아일랜드 방언과

음성을 흉내 낼 줄 모르는 낭독가의 음성을 듣고는 막귀에도 너무 어색하다. 미국인이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소설을 읽으면 그렇게

듣기가 불편하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자를 타자화(他者化)한다는 바람이 불었다. 그렇다면 영어에서 음은 누굴 기준으로 해 타자화 할 건가?

호주, 뉴질랜드, 영국, 미국, 남아공, 캐나다 바로 이런 발상을 기준으로 해 한국식 한자의 지역적 발음을 상대적으로 인정하자는 거다.

 당당한 한국어로 한자를 복권하는 거다.

이런 공동의 인정을 통해 동북아는 한자를 통한 새로운 문화적 국경을 유럽의 지리적 국경처럼 열고 소통의 르네상스를 더 활짝

열 수 있지 않을까? 신속하게 발전해 가는 기술 혁신에 발맞춰 공동의 한자어를 제정시켜 역내 상대국가 간에 한자어 교육의 부담도

낮추고, 교육 효과도 실용적으로 높이고 늘리는 것은 종국적으로 중국에 사대하는 일인가?

전자책의 발전이 확장되면 한국의 출판계에도 중국이나 일본의 시장이 근접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몇 년 전 어떤 신문에 의하면

한국의 등단한 소설가의 연평균수입이 100만 원이고, 시인의 경우 30만 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노벨상을 떠나 한국의 문학이나

문학의 기반이 되는 인간 사회는 시장이 얕고 좁아 고사하고 말 것이다. 특정 시인만이 해마다 오르내리는 것도 보기에 안쓰럽다.

노벨 문학상은 도둑처럼 와야 한다.

삼국의 언어학자들과 교육 정책 담당자들이 모여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과 문화의 존중을 위한 언어를 통한 교감을 할 수도 있게 된다.

 타국어의 연구에도 학술대회가 있는데 실용적 한자어 사용에 동북아의 공용된 한자 조어를 위한 학술 대회를 가지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한반도에서 한자는 지역 교통어(交通語)로 부활시켜야 한다. 문화의 교집합으로서 영어는 국제 수많은

언어 간의 교통어다. 스페인어도 언중이 확대되니 미국 내 위상도 크다. 한자를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흡수와 발전을 시켜야 할 대상이다.

아울러, 한글도 폐용된 자음을 다시 연구해 그 음을 복원시켜 다양한 제 외국어 음을 표현하는 데 쓸 수 있도록 하는 일도 한자만큼

정밀한 한국어를 만드는 데 중요한 분야라고 본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