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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軍이 러 스파이죄로 동포 처형 직전 중국인의 표정엔…루쉰(魯迅)이 개조하려한 中국민성은?

yellowday 2014. 2. 1. 19:01

 

입력 : 2014.02.01 17:05 | 수정 : 2014.02.01 17:21

지금부터 중국 사상가들의 사유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중국 정부의 ‘루쉰(魯迅·1881~1936) 지우기’라는 기획 아래

중국인의 뇌리에서 지워지고 있는 문학가 겸 사상가인 루쉰, 그로부터 여행을 시작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국이 독자적인 중국 모델론을 만들려면 공자, 루쉰, 마오쩌둥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각각 유학, 근대, 인민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며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논어에 나오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한다(知其不可而爲之)’는 점이다. 이들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 절망에 저항하는 인물들이 아니었던가.

여기서 ‘안 되는 것’이란 바로 인간관계의 변혁이다. 이 세 인물은 인간관계의 변혁이 안 된다는 절망적 상황을

알면서도 그것을 하려 했던 ‘우공이산(愚公移山)’들이다.

루쉰은 섬뜩할 정도로 리얼하게 자신을 포함한 중국에 대해 ‘되돌아보기(反思·reflection)’를 시도했던 흔치 않은

지식인이었다. 어떤 문제든 시대적 통념에 기대지 않고 자기 생각을 가지고 ‘다시 보기’를 시도했다.

어떤 점에서 루쉰은 그 자신이 비판했던 공자와 매우 역설적으로 닮아 있다. 공자가 다른 사람과 가장 달랐던 점은

자기가 사는 시대를 객관적으로 보고 성찰적으로 재해석하려 했다는 점이다.

공자의 시도는 그런 점에서 반동적 복고가 아니라 창조적 복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단순한 관습으로 내려오던

예에 대해 창조적 해석을 시도했다. 관습적 예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여 춘추전국이라는 혼란의 시대에 새로운 지표를 제공하려 하였던 것이다.

루쉰은 ‘광인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무슨 일이나 연구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늘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것을 나도 기억하고 있지만 똑똑히는 모르고 있다. 그래서 역사책을 뒤져보았지만 역사책에는 연대도

밝혀져 있지 않고 그저 인의도덕(仁義道德)이라는 글자만이 삐뚤삐뚤 적혀 있을 뿐이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밤중까지

열심히 살펴보았더니 드디어 행간에 글자가 나타났다. 책 전체에 사람을 잡아먹는다(吃人)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광인일기’ 이후 중국에서 루쉰은 유교 비판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루쉰은 유교 그 자체보다는 어쩌면 습속화된

예교를 겨냥했다. 현재 루쉰이 지워지고 있는 것은 그가 저항을 상징하는 인물이어서 그렇지만 사회주의 시기 내내

유교 비판의 상징으로 소비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대혁명 시기 공자는 비판되었지만 루쉰은 선양되었다.

지금과는 처지가 완전히 달랐다. 그러니 장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시대가 바뀌면 언제 또 이 상황은 뒤바뀔지 모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루쉰으로 들어가보자. 그의 일관된 관심사는 계몽과 민중(농민), 지식인이었다. 그는 민중의 각성이야말로

중국이 변화할 수 있는 최대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 전반기에 보여주었던 ‘국민성’에 대한 관심은 이를 반영한다. 루쉰의

단편과 장편(掌篇) 소설 중 다수가 민중과 지식인의 관계, 또는 지식인 문제를 주제로 했다. 계몽은 민중과 지식인을 연결하는 다리다.

그러나 그에게서 계몽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계몽은 아니다. ‘계몽을 회의하는 계몽’이다. 그는 민중의 계몽에 있어서 지식인이

어떤 식이든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또한 지식인에 대해서도 매우 냉소적이었으며 그들의 허위의식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폭로했다. 민중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애(愛)와 증(憎)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루쉰의 계몽은 지식인의 일방적

계도가 아닌 민중의 일상적 욕망을 수용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 의사 지망생이었던 루쉰이 문학가로 인생 방향을 돌리기 된 계기는...

루쉰이 계몽이라는 문제를 처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유학 시기였다. 루쉰은 1902년 21세 때 일본에 유학했는데,

그가 의사 지망생에서 문학가로 방향을 돌리게 된 계기가 센다이(仙臺) 의대에서의 ‘환등기 사건’이었다. 당시 세균학을

가르치는 나카가와(中川) 선생은 값비싼 독일제 환등기를 사서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 사이사이 러일전쟁 관련 필름을 보여주곤 했다.

러시아군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죄목으로 일본군에게 끌려와 처형당하기 직전의 한 중국인이 총구를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

환등기를 통해 루쉰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를 둘러싼 무표정한 구경꾼들은 다름 아닌 중국인이었다. 루쉰은 “구경꾼들은 모두

튼튼한 체격이었지만 표정만은 멍청했다. … 당시 나로서는 중국인 몇 명의 육체를 고치는 것보다 정신의 개혁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정신의 개혁에는 문예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한다.

의사 지망생에서 문학가로 인생 방향을 돌리기로 결정한 그날 밤, 루쉰은 온 산을 헤매고 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듯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문득 자신이 깊은 산 속에 버려진 상처 입은 짐승 같다고 느꼈다. 상처 입은 짐승, 헤매는 영혼으로 평생을

살기로 결심하면서 아마 내림굿과도 같은 심한 몸살을 겪은 것이리라. 1907년 의학을 포기하고 센다이에서 도쿄로 옮겼다.

그가 20대였던 시절에 쓴 몇 편의 긴 글에는 루쉰 철학의 방향이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다. 루쉰이 중국인을 표상하는

‘아큐’와 아큐로 구성된 인간관계의 모습을 처음 발견했던 것은, 어린 시절 과거제 시험과 연관되어 할아버지가 투옥되고 이후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에서였다. 떵떵거리고 살던 가문이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친절하던 주변 사람들은 태도가 달라졌다.

이들의 냉대를 겪으면서, 루쉰은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야말로 세상 사람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소년기에 이미

가족제도를 지탱하고 있는 낡은 예교의 뒷면에 도사린 추악한 인간관계를 어렴풋하게나마 간파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인간관계를

원형으로 하는 중국사회라는 골치 아픈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갈까 하는 고민은 아마 이 시절의 ‘불행한’ 경험에서부터

싹텄을 것이다. 루쉰의 대표작인 ‘아큐정전’에서 중국인을 상징하는 아큐상의 원형은 이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큐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는 바로 앞의 환등기를 통해 보았던 구경꾼들, 즉 당하고 있는 이를 무표정하게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다. 타인의 불행을 동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양분 삼아 살아가는 중국인, 그가 바로 아큐였다. 아큐는 노예라는

약자의 입장에 처해 있으면서도 반항할 줄 모르고, 오히려 자기와 같은 위치에 있는 약자를 무시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인이라는

강자의 위치로 올라서서 자기 밑에 있을 노예를 압박하리라고 상상하는 노예이다.

루쉰은 이를 약자의 자위에 지나지 않는 ‘정신승리법’으로 보았다. 그는 중국인이 4000년의 문화전통을 들먹이면서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결국 이런 ‘정신승리법’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이런 것들이 바로 루쉰이 비판해 마지않는 국민성의 요체이다. 아큐로 상징되는 중국인,

그리고 이들이 형성하는 먹고 먹히는 음험한 인간관계, 이 증오스러운 현실은 바로 루쉰의 계몽이 출발하게 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루쉰이 유학에서 돌아와 맞닥뜨린 현실은 유학 시절 구상했던 계몽과는 너무나도 이율배반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첸쉬안퉁(錢玄同)이 ‘신청년’의 원고를 부탁해 왔을 때 이렇게 말했다. “무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지.

창문도 없고 무슨 방법으로도 부술 수 없는 방인데,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곤히 잠들어 있다네. 머지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게 될

것이지만 잠이 들고 나서부터 죽음에 들기까지 죽음이 닥쳐왔다는 슬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지. 그런데 자네가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해서

조금이나마 의식이 깨어 있던 몇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 때문에 이 불행한 소수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면 자네는 그 사람을 볼 낯이 있겠는가.”

루쉰은 자각까지는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그 다음부터가 문제인 것이고 이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즉 루쉰은

개인의 자각 ‘이후’를 문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이 루쉰의 계몽주의가 갖는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다.

루쉰에게 봉건성으로 표상되는 중국은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중국은 계몽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 정도로 강고한 철옹성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봉건은 일찌감치 성숙하고 완비되어 제도와 일상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었다. 너무도 깊숙하여

의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탈출해야 한다는 자각을 갖기가 힘들다. 혹시 의식하여 탈주한다 해도 완비된 봉건의 주술로부터의

탈주는 곧 악인으로 지탄받는 길이다.

‘광인일기’에서 ‘악인’은 ‘인육을 먹은 사람(吃人)’으로 구성된 다수자의 눈으로 볼 때 의견이 다른 소수자이다. 봉건의 완비된

구조하에서는 이견을 가진 소수자인 악인은 지탄의 대상이 되지만 남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시스템의 공모자가 된 다수자는 그렇지 않다.

계몽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루쉰의 지식인론과 민중론은 모두 봉건의 강고성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사대부 또한 봉건이 완비되는 데 협력한 공범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공범 안에는

지식계층으로서의 루쉰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공범의식은 자기자신도 계몽해야 한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자신도 교정 대상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의 계몽이 진정성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 루쉰이 국민성 개조에 관심 갖게 된 실질적 계기는 신해혁명의 실패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루쉰은 봉건과 근대가 혼재된 대격변기에 목격되는 여러 유형의 지식인 모습을 단편소설과

잡문을 통해 제시한다. 여기서 가장 인상에 남는 세 가지 유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계의 전사’다. 이들은

노예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압제자에게 반항해서 인간적 독립을 얻기 위해 싸우는 존재이다.

이 존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관계의 근원적 해소이다. ‘정신계의 전사’는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에

반항하고 여력이 있으면 다른 약자를 도와주는 일을 한다. 루쉰에 의하면 이는 인류 중에서 가장 진화된 모습이다.

루쉰은 여기서 바이런의 말을 빌려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면 자기 나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를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는 국가를 초월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단편소설 ‘공을기(孔乙己)’의 주인공과 같은 시대착오적 지식인이다. ‘정신계의 전사’가 루쉰 초기 사상에서 보여주는

이상적인 지식인 유형이라면 1911년 신해혁명 실패를 경험한 후의 지식인상은 매우 비관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공을기’를 통해 보여주는 지식인상은 가련하기까지 하다. ‘육경’에 팔려버린 영혼으로 인해 시대와 호흡하지

못하고 쇠락해가는 과정을 동정적이면서도 동시에 풍자적 필치로 그려낸다. 비록 공을기를 풍자하고 있지만 공감의 시선도

보낸다. 신(新)과 구(舊)가 교차하는 시기에 지식인의 무력함과 무책임함이 겹쳐 있다. 루쉰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셋째, ‘검은 사람’이다. 만년의 루쉰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식인 유형은 소설 ‘검을 벼린 이야기(鑄劍)’를 통해서 나온다.

여기서 주인공 ‘검은 사람’은 평범한 젊은이였으나 어머니의 바람으로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조용하고도 강인한 사람으로 변화해간다. 그런데 정작 복수는 오히려 복수가 완성된 이후에 시작된다.

루쉰이 계몽 이후를 문제 삼았던 것처럼 여기서도 복수 ‘이후’가 사유의 출발점인 것이다. 여기서 복수한 사람과 복수당한

사람이 한 솥 안에서 죽은 후 서로 엉기어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루쉰은 복수의 허무함과 무의미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검을 벼린 이야기’로 루쉰은 1920년대 중반의 비관적 정서로부터 벗어난 듯 보인다. 루쉰은 1927년 사랑하는 여인

쉬광핑(許廣平)과 광저우(廣州)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당시 루쉰의 생활은 활력으로 넘쳤다. 역사에 대한 비장감은

사랑을 얻음으로써 천하를 얻은 인생전환과 관련 있지 않을까.

루쉰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신문화운동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국민성의 개조에 주력해 온 인물이다. 루쉰의 시종 관심사는

국민성과 지식인 문제였다. 아큐로 상징되는 국민성의 외연 안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사대부까지 포함된다. 농민과 사대부는

중국의 개혁을 전망하는 데 관건적 계층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아큐정전’과 ‘광인일기’는 농민과 사대부의

집단 인격의 심층을 의미심장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루쉰이 국민성의 개조에 관심을 갖게 된 실질적 계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해혁명의 실패이다. 신해혁명은

정치적으로는 공화제를 가져다 주었지만 인민들의 의식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고 루쉰은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신해혁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고발한 작품이 ‘아큐정전’이다.

루쉰에게 지식인과 민중, 그리고 계몽이라는 주제는 봉건과 근대에 대한 시선과 많은 부분 겹쳐진다. 루쉰은 전통의

중압 아래 신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역설적으로 전통과의 대결을 지나치고서는 근대를 낳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전통과의 대결을 거쳐 근대가 도출된다 해도 그 이후가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다른 계몽가와 달리 계몽 이후를 문제 삼았던 것도 근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은 데서 연유한다.

봉건의 주술이 인간을 속박했던 것보다 근대의 이성은 인간의 종속을 훨씬 심화시키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근대에 대한 역설적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인식을 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선배 사상가 장병린(章炳麟),

서양철학자 니체,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슈티르너(Max Stirner) 등에 대한 사상적 편력이 존재한다.

장병린에게서는 중국의 전통을, 니체에게서는 서양의 근대에 대한 역설적 사유를, 슈티르너에서는 체제에 대한

전복적이고 무정부적 사유를 보았다. 루쉰의 글들이 지금도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데는 그의 사회비평과 문명비판에서

묻어나는 고독과 비애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이들 사상가와의 조우와 관계가 있다.

루쉰은 보수와도 싸웠지만 진보와도 싸웠다. 그가 논적들과 줄기차게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에 대해 일본의 근대 사상가이자 루쉰 연구자인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루쉰 내부의 모순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 모순은 바로 자신도 식인(食人)의 경력이 있다는 어떤 원죄의식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을까. 역사가 진보하지 않는다는

비극적 역사인식 이후에 오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절망에 대한 저항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매우 확실하게 종점은 바로 무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며 누가 가르쳐줄

필요도 없다. 문제는 여기서 거기로 가는 길에 있다.”(잡문집 ‘무덤’)

이 글에서는 ‘문제는 여기서 거기로 가는 길에 있다’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강렬한 감수가

생에 대한 강한 애착을 불러왔을 수 있다. 그에게서 싸움은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강렬하게 자각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그의 현존 방식이다. 그의 비관주의는 그래서 오히려 더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중국의 철학자 리쩌허우에 의하면

루쉰의 특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의 죄악에 대한 분노에 찬 항의’를 사회를 초월하는 형이상적인 인생의 고독감과

융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니체와 중국 전통정신 사이의 기묘한 융합이라 할 수 있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