貴寶物 味飮食

화려함의 저점, 칠보단장

yellowday 2013. 11. 30. 03:21

 

칠보의 유래와 역사


 

칠보는 금속 위에 칠보 유약을 얹고 섭씨 600~900℃ 정도의 고온에 녹여 금속에 융착시킴으로써 금속 표면에 다양한 색상을 입히고,

금속의 산화를 막아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기법이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즐겨 사용된 장식 기법으로

보석의 활용이 높지 않았던 과거에는 보석을 대신하기도 했다.

칠보는 주로 장신구나 금속용기의 표면에 입혀져 아름다운 색상을 발휘하는데 도자기나 유리에도 칠보 장식을 할 수 있다.

원래 동양에서 칠보七寶란 불교에서 이르는 일곱 개의 보석 즉, 금, 은, 유리, 거거(車渠, 대왕조개), 산호, 마노, 진주를 뜻하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동양에서 아주 귀히 여겨지던 보석이었다. 칠보가 이러한 최고의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운 빛과 광택을 지니고 있어

칠보라 이름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우리나라에서 칠보는 조선시대까지는 파란 혹은 파랑이라 불렀다. 이는 칠보가 전해진 비잔틴제국을 이르는‘폴린(Polin=the City)’이라는 말을

중국이‘법랑’이라고 표기하고 중국식으로‘화란’이라고 발음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는 칠보 중에서 철이나 알루미늄에 입히는 불투명의 칠보를 법랑이라고 한다.칠보의 기법적 기원은, 기원전 2,000여 년 전에서부터

시작된 이집트 장신구 보석상감기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석상감 기법이란 바탕금속으로 개개의 독립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보석과 색 유리, 색 도자기 등을 일일이 박아 넣은 것으로 다양한 색상과 정교함으로 인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금속 표면 장식기법이다.

칠보 용어 중 불어인‘클로와조네(cloisonne)’는 그 뜻이‘셀(cell)’즉‘작은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집트의 보석상감기법을 연상시킨다.

 

칠보 유약은 가루 상태의 규석, 연단鉛丹, 붕사, 소다를 혼합하여 도가니에 넣고 섭씨 1300℃로 온도를 올려 액상상태로 만든 뒤 냉각시켜

덩어리 상태로 만든 뒤 이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고, 여기에 색을 내는 안료가 되는 유기금속 산화물을 혼합하여 다시 섭씨 950℃로 녹인 뒤

굳혀 가루로 만들게 된다. 칠보의 섬세하고도 화려한 색상은 발색제인 다양한 금속 산화물 덕분이다.

예를 들어 붉은색은 산화철과 구리의 혼합으로 얻을 수 있는데 투명도 높은 붉은색은 금 산화물이 사용되므로 가격이 높다.

칠보유약은 쓰임과 용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제작되는데 순금, 순은용, 동용 칠보유약과 철용, 알루미늄용, 도자기용, 유리용 등

바탕재료에 따라 다르고 또 투명도에 따라 투명, 반투명, 불투명 칠보로도 나뉜다. 칠보 유약의 형태는 가루를 기본으로

선형, 덩어리형, 액상형, 펜슬형 등 용도에 맞게 세분화 되어 있다.

우리의 칠보


 

동양문화 속의 칠보는 유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매우 독자적인 특성을 보이면서 발전했다.

중국 칠보는 당나라 이전부터 유물이 남아 있는데 칠보가 본격적으로 제작된 것은 원나라가 유럽 원정을 감행 한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후 15세기 중반 명나라 경태제에 이르러서‘징타이란’즉‘, 경태조 남색’이라고 하여 남색을 주색으로 하고

황색, 녹색 등의 칠보유약을 쓰는 동선 유선칠보가 유행했다.

 

청나라 건륭제 시기 바탕 금속을 순동으로 하는 재료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18세기에는 중국식과 유럽식이 혼합 된 칠보가 제작되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우리나라에 칠보가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 불교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장신구와 불교 기물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한반도에서 일본에 칠보 기술이 전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초기 칠보 유물로는 7~8세기경 제작된 경주 분황사탑에서 발견된

은제 침통이 있는데 은 소재 겉면에 유리질의 녹색 칠보가 입혀져 있다. 안타깝게도 고려시대의 칠보 유물은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고

조선시대 특히 조선시대 중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칠보가 애용되었다. 한편 칠보의 흔적이 미미했던 일본에 17세기 조선 칠보 기술이

재 전수 되었고 이후로 유럽의 도움으로 일본 칠보는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화려함의 격을 더하는 칠보단장


 

조선의 미를 논할 때 고아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나 세련미는 쉽게 떠올리지만 화려함은 멀찍이 두는 것이 관념화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충분히 화려했다. 그리고 그 화려함의 정점에 칠보가 있다.조선시대 한복의 맵시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장신구는

다양한 종류의 노리개를 비롯해 비녀, 가락지, 떨잠, 뒤꽂이, 족두리, 화관, 드림댕기 등 그 종류가 매우 많다.

이들 장신구에 쓰이는 보석으로는 옥, 산호, 진주, 호박, 마노 등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칠보 장식과 함께 제작 되어 화려함의 격을 높였다.

 

칠보의 색상은 조선시대의 기본 사상이자 미의식의 근저를 이룬 오방색을 기본으로 그 간색인 빨강·노랑·청색·녹색·보라 위주의 칠보 유약을 사용했다.

주로 산호나 호박 등 보석 물림 난집 장식에 칠보가 사용되었는데 사용된 보석과 동색 혹은 보색 대비를 유도해 세련미를 한껏 높였고

금과 은으로 장식된 나비와 박쥐 등의 문양 위에 칠보를 덧입혀 생동감과 함께 미적 가치를 더하고 문양의 의미를 강조했다.

칠보는 유리질의 유약을 얇은 금이나 은 때로는 동판 위에 녹여 고착시키므로 외부의 충격에 취약할 수 있어 많은 경우 칠보 유물은

칠보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바탕 금속재만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제작된 칠보 패물들 중 다수는

아주 섬세하고도 선명한 색상을 유지하고 있어 조선시대 칠보 장인들의 전문성을 엿볼 수 있다.칠보 유약의 확보가 비교적 용이해진 근대에 이르러

칠보는 장신구와 기물 이외에도 여러 장식재에 널리 쓰여 칠보유약 제조가 활발해졌고 칠보 전문 작가들이 그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칠보의미래


 

현대에 이르러 칠보보다도 더 안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색상을 얻을 수 있는 안료와 기법이 많이 개발되었다고 해도 이들이 칠보가 구현해 낼 수 있는

깊이와 가치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 현대 칠보 작가들이 끊임없이 칠보의 색상 개발과 새로운 표현법을 연구하는 것은 칠보가 갖고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과 가능성에 매료되어 있기 때문이다.지난 4,000여 년 동안 인류와 함께한 칠보는 세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화 속에서 충분히 발전하고 새롭게

창조되었지만 앞으로 더욱 더 우리다운 색감을 발견해 내고 이를 자양분 삼아 우리만이 구현 할 수 있는 유일한 칠보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글·사진. 이정임 (한양대학교 주얼리·패션과 겸임교수) 사진.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