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장제스(중국어 정체: 蔣介石, 병음: Jiǎng Jièshí,

yellowday 2011. 4. 10. 21:46

               
장제스
1887년 10월 31일(1887-10-31)
청나라의 국기청나라 저장 성(浙江省) 펑화 현
1975년 4월 5일 (87)
중화민국의 국기타이완
병사
중화민국의 국기타이완 타이베이
청나라의 국기청 제국
중화민국의 국기중화민국
장중정(蔣中正)
바오딩군관학교
독립운동가, 사상가, 정치가, 중화민국 총통
기독교
마오푸메이(毛福梅), 야오이청(姚怡誠), 천제루(陳潔如), 쑹메이링(宋美齡), 일본여인(첩)
장징궈(蔣經國), 장치엔화, 장웨이궈
장지총(蔣肇聰), 왕차이위(王采玉)
장샤오옌(손자)·쑨원(인척)
서명
Chiang Kaishek Signature.svg

장제스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장제스(중국어 정체: 蔣介石, 병음: Jiang Jieshi, 영문 표기: Chiang Kai-shek, 통용: 장개석,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또는 장중정(중국어 정체: 蔣中正, 병음: Jiang Zhongzheng)은 중국의 군인, 정치·군사 지도자이다. 종교는 기독교이며, 황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중국 행정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 중국 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20일부터 1949년 1월 21일까지는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중국 본토의 국가원수를 지냈고 1950년 3월 1일부터 1975년 4월 5일까지 2~5대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했다. 1930년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목차

[숨기기]

 

1887년에 청 제국 저장 성(浙江省) 펑화 현(奉化?)에서 소금상인 장지총(蔣肇聰)과 왕차이위(王采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산층 상인 집안이었는데 아버지는 장제스가 8살때 갑자기 죽었다. 전통에 따라 장제스는 이웃마을의 여인 마오푸메이와 결혼하였는데 이 결혼에서 아들 장징궈과 딸 장치엔화를 낳았다.

청년기

장제스와 쑨원

장제스가 청소년기를 보낸 시기는 중국 군벌의 군웅할거와 외세의 침입으로 군사적으로 중국이 매우 약해진 시기였고 야심많았던 장은 군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1906년 바오딩군관학교에서 군사수업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09년 5월 27일 21기로 졸업하였다. 일본에서 그는 다른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봉건 청조에 반대하고 중국에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고자하는 열망을 가지고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장은 일본 제국군에서 복무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군을 이끌었고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 쑨원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위안스카이의 반동정책에 맞서 싸웠고 잠시 상하이의 지하 폭력조직인 청방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그는 다시 쑨원의 휘하에서 군사업무를 보았고 1923년 쑨원과 그의 아내 쑹칭링을 암살범의 기관총 공격에서 구해내어 쑨원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무렵 쑨원은 소비에트 연방과 손잡고 제1차 국공합작을 실시했는데 이때 장제스는 군사자문단으로 소비에트로 가서 소비에트군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당시 중국 혁명의 성공여부는 바로 군사력에 달려있었는데 쑨원은 혁명을 실천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광저우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였고 장제스는 그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장은 이 학교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많이 길러냈으며 황푸학교는 국민당내에서 장제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편집]

권력에 오름 [편집]

북벌기간중 장제스, 1926년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죽자 국민당의 권력을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국민당 우파로 기울었고 쑨원의 또다른 신임을 받고 있던 왕징웨이는 국민당 좌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왕보다 국민당내의 서열이 낮았지만 황푸학교 출신의 부하들의 지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산함 사건을 일으켜 결국 국민당 권력을 잡았다.

한편 국민당은 1925년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장제스는 그 총사령관이 되어 군벌들로부터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는데 이때 국민당군은 세 개의 파로 나뉘어 북쪽으로 진군했다. 이때 우한으로 진군한 왕징웨이등 국민당 좌파는 우한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과 별개의 우한국민당 정부를 세우고 장제스와 대립하게 되는데 난징상하이를 탈환한 후 장제스는 국민당내 좌파와 공산당을 소탕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대대적인 공산당 소탕작전을 펼치고 이후 중국 전역에서 대규모 공산주의자 학살이 일어났다. (4.12사건 참조) 이 사건으로 좌파을 일소한 장제스는 거침없이 북벌을 단행하였고 1928년 6월 베이징을 탈환하고 마지막 남은 펑톈군벌 장쉐량을 복속시켜 마친내 중국을 국민당의 깃발 아래 통일 시켰다.

한편 장은 유력하고 부유한 가문인 쑹가문과 유대를 맺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1927년 쑹메이링과 결혼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정권의 총통이 되어 강력한 군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았다. 원래 쑨원의 계획대로라면 그는 새로운 중국은 민주적인 절차와 헌법을 가져야 했으나 장은 당면한 현안문제들 (잔존 군벌의 불안, 중국 공산당의 분열, 가속화 하는 일본의 침략)등을 들어 자유주의적 운동을 탄압하고 완전한 개혁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특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기 전까지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기로 하였고 일본은 야금야금 대륙을 침입해 들어왔다. 그는 1930년부터 지속적으로 공산당 지배지역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는데 완전히 섬멸할 수 없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들에게 유교적 국가숭배의식을 부활시켰고[출처 필요], 신생활운동을 전개했으며 자신을 곧 국가와 동일시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남의사와 같은 정보기관을 동원하여[출처 필요] 공산주의자와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하였다. 한편 한국의 독립운동을 승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중일 전쟁과 국공합작

장제스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 스틸웰

계속되는 토벌전으로 중국 공산당은 결국 주요 근거지인 장시 성 해방구를 잃게 되고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전술을 택해 중국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이른바 장정을 감행한다. 장제스는 옌안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총공격을 준비하고 잇었는데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시안 사건을 일으키고 이로서 상황은 급변하여 장제스는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하여 항일 전쟁에 들어간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장제스는 국민정부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고 1941년 연합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 4년동안 중국은 단독으로 일본과 교전했다.

중화민국 총통

카이로 회담.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1943년 11월 미국루즈벨트, 영국처칠, 소련스탈린이집트 카이로에 모여서 '카이로 회담'을 하였다. 이때 한국 독립 문제를 거론하였고 회의에서는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결의를 얻어냈다.[1] 그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건의한 것에 대해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의 의거에 있다고 보았다.[2] 1945년부터는 다시 중국공산당과 사이에 국공내전이 발발하여 1949년에는 종국적으로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피하게 된다.

한국 임시정부 지원

장개석은 쑨원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웠다. 1919년 8월 쑨원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방침을 밝힘에 따라 장제스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별다른 지원을 보이지 않았다. 국민당 내에는 황푸군관학교와 조선의용단 인맥인 김규식·김원봉의 일파와 관계를 맺는 군부내 파벌이 존재하였고 장제스는 임시정부나 김규식·김원봉 일파에 대한 특별한 지지입장은 표명하지 않고 있었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장제스는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수시로 지원금을 보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키던 김구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김원봉 등을 설득하여 연합전선 구축을 권고하기도 했다.

타이완 총통

타이완으로 건너가 그 후 1950년에 총통으로 취임하고 본토 회복을 위한 몇 차례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한때 부패했던 국민당 조직을 개편했고, 공산 중국에 맞서는 자유의 선봉으로 나섰다. 1950년 6월 대한민국에서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남한에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1949년 대한민국 진해시 이승만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11월 중화민국을 방문해 장개석 총통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1955년 미국은 국민정부와 타이완 방위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방위우산으로 편입하고 그 원조에 힘입어 그후 20년 동안 타이완의 경제발전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72년초 닉슨의 중공 방문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타이완은 고립되었고 그러던 와중 1975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아들 옌자진 대행체제를 거쳐 장징궈가 국민당 주석 및 타이완 정부 수반으로 그 뒤를 이었다.

평가와 비판

중정 기념관.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는 중화민국의 지도자로서 칭송받는 면과 공산주의자를 탄압한 4·12 쿠테타를 일으킨 독재자로서 비판받는 부정적인 평가의 양면이 존재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유가 국민당의 부정부패이었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강력한 처벌로 일소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외의 정당들은 형식적인 정당에 불과한 국민당 1당독재, 좌익정치세력에 대한 백색테러로 불리는 우익테러,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늦게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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