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1724년 프로이센의 상업도시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에서 수공업자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와 어머니 안나 레기나(Anna Regin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명의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11명의 자녀 중 어른 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5명뿐이었다). '에마누엘'(Emanuel)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히브리어를 공부한 후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이마누엘"(Immanuel: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2])로 바꾸었다.[3] 그는 삶을 통틀어서 쾨니히스베르크로부터 100마일 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한 적이 결코 없다.[4] 그의 아버지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 (1682–1746)는, 당시 프러시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시인 메멜로부터 이주한 독일인 마구(馬具) 제작자이었다. 그의 어머니인 느 레기나 도로시아 류터(née Regina Dorothea Reuter) (1697–1737)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5] 칸트의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 프러시아로 이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의 성을 스코틀랜드식("Cant")으로 적곤 했다.[6] 어렸을 때 칸트는 돋보이지는 않았으나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경건주의를 따르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기독교의 경건주의는 종교적인 헌신과 겸손함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로 칸트가 받은 교육은, 수학과 과학보다는 라틴어와 종교 훈련을 우선시 하였고, 엄격하고 가혹하며 훈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칸트의 부모는 청교도적 생활을 하였으며, 이는 유년시절의 칸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진다. 칸트는 1732년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신학자 슐츠[주 1]가 지도하던 사학교 프리드릭스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1740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에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에게 논리학과 수학을 지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고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매료되었다.[8]
후대의 칸트전기작가들은 칸트가 대학졸업 후 수 년에 걸쳐 지방 귀족가문의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홀로 철학연구를 계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는 곧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1755년 6월 12일 박사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Princip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후 대학에서 일반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신학, 윤리학등 여러 분야의 주제로 강의했다. 1756년 크누첸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1764년 프로이센의 교육부에서 제공한 문학 교수자리를 거절할 정도로 철학교수직을 갈망했다. 18세기까지도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어 철학의 영역에 속했다. 1766년에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왕립도서관의 사서로 취직하여 1772년까지 근무하기도 했다. 그사이 칸트는 원하던대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철학교수직를 얻게되는데, 이때 발표한 교수취임논문(1770년)은 칸트 비판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10여 년간의 철학적 침묵기를 거친 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초판:1781년, 재판:1787년), 《실천이성비판》(1788), 그리고 《판단력비판》(1790)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그의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였다.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1786-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1796년까지 약 20여 년간에 걸쳐 칸트는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으며, 알려진 것처럼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강의와 사유에 전념했다. 다만 1792년에 논문출판과 검열을 두고 학부 관리처와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의 논문은 《인간본성에 있어서의 근본악에 관하여》(Vom radikalen Bösen in der menschlichen Natur)란 제목으로서 당시의 계몽주의사상과 종교에 관한 칸트의 솔직한 견해가 대학 관리처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커피와 담배를 즐겼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새벽 4시, 80세를 향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겼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