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평양시내에 종업원이 100여 명에 달하는 요리집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사업가였는데, 사업으로 번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할 만큼 민족의식이 뚜렷한 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에는 귀한 신식 물자인 타자기를 구해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많은 열정을 보이는 분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석주명이 민족문제과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릴 때부터 토끼,비둘기같은 동물을 좋아해 집에서 길렀으며, 1921년 장로교 선교사 베어드가 세운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며, 1926년에 졸업하였다. 송도고보 학생 시절에 석주명은 집에서 떠나서 공부했는데, 한때 음악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 하기도 했다. 집에서 많은 생활비를 보내주는데다가, 공부를 감독할 부모가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낙제 과목이 나올 정도로 성적이 나쁘게 나오자 그제서야 정신차리고 방학 동안 공부에 힘썼는데,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아들이 잘 있는지 걱정되어서 하숙집에 온 어머니가 아들이 열심히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는 안심이 되어 집에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일본 최고의 농업 전문학교의 하나인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鹿兒島高等農林學敎)와 경성제국대학에서 공부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석주명은 대만에서의 곤충채집여행때 비를 맞지 않으려고 나무에 모인 하루살이들을 채집할 만큼 끈기가 있는 학생이었다. 졸업 후에는 송도중학교에서 생물 교사로 일하면서 한반도의 나비에 대해서 연구했다. 이는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 재학시 지도교수의 충고에 의한 것이었다. 졸업할 즈음에 석주명에게 교수는 장래를 물었는데, 석주명은 차별 때문에 학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교수는 "한 분야에 10년간 집중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며 한반도에 사는 나비 연구를 권했고, 석주명은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나비 연구 [편집]
1931년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 동물학자들의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았다. 당시 일본인 동물학자들은 조금만 다른 특징이 있으면 새로운 종류라고 주장하여 한국의 나비가 844종이라고 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주명은 〈조선산 나비 총목록〉(1940년)을 통해 한국의 나비는 248종이라고 바로잡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당시 석주명은 배추흰나비 16만여 마리의 무늬를 비교했는데, 그 결과 무늬가 다르다고 하여 다른 종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비는 같은 종류라고 할지라도 성, 계절등에 따라 몸의 크기와 무늬가 다르다. 그런데도 성급하게 무늬와 색상만으로 다른 종류라고 잘못 생각하던 일본 학자들의 관행을 바로 잡은 것이다 그는 나비의 분류에 관한 80편이 넘는 논문을 남겼다. 또한 제주 방언에 대한 논문과 에스페란토어 교과서를 쓰는 등 언어학자로도 활동했다. 1945년에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과 국립대학 강사직을 맡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가 붙여준 나비이름으로는 신부나비(천주교 신부들의 예복을 연상한 이름), 도시처녀나비, 유리창나비, 수노랑나비, 부전나비(부전은 어린이들의 장식용 노리개를 말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부전나비는 몸집이 작아서 귀엽고, 날개색상이 화려해서 예쁜 나비이다.), 깊은산부전나비 등 다양하며, 학명에 그의 성(Seok)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