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莊祖, 1735년 음력 1월 ~ 1762년 윤 5월)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의 왕세자이자 추존왕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나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시호와 존호는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1]였다가 후에 왕으로 추존되면서 묘호를 더하여 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2]
출생과 세자 책봉 [편집]
1735년 음력 1월 21일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원자정호를 받았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모친인 영빈 이씨의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성장하였다.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그는 영조의 맏아들이며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었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 [편집]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3] 10세 때 노론 출신 참봉 홍봉한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한중록에 의하면 이는 난폭함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또 세자는 왕의 젊은 총희(寵姬) 문숙의(文淑儀) 남매와 사이가 좋지 못해 이들의 참소가 심했다. 김상로, 홍계희 등 노론 중진과 노론 출신 왕족인 김한구, 김귀주 등도 그를 공격했고, 처가인 홍봉한일가 조차 당론을 따라 그에게 공격적이었다. 노론측은 그가 정신병을 앓았다고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이덕일은 그가 광증을 앓았는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15세가 되는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소론을 지지하던 그는 경종의 독살설을 나인들에게 전해듣고 부왕 영조에게 황숙은 어떤 죄로 죽었느냐며 항변하여 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대리 청정 기간 [편집]
1752년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한 뒤부터 영조와 세자의 사이가 나빠지고 대립관계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3]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이것이 영조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3]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등 형편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여 백성들의 짐을 경감시켜 주었고, 가난한 평민들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3] 이런 선정으로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의 온양 행궁 때는 백성들로부터 열의와 같은 환호를 받았으며 이때는 도성에 있는 부왕 영조를 그리워하는 편지서찰을 보내기도 했다. [4]
또한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숙의 문씨(淑儀文氏)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었다 한다.
한편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던 혜경궁 홍씨 역시 세자에 대한 정보를 빼내 홍봉한, 홍인한 등에게 제공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사도세자는 형수인 효순현빈 조씨의 남동생이자, 영조가 탕평파로서 총해하던 조문명의 아들 조재호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경언 사건과 사형 [편집]
노론을 지지하는 아버지 영조와 정견을 달리 하여 대립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죽음의 결정적인 이유라는 주장이 있다. 1762년(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다. 이를 본 영조는 크게 화를 내어 세자의 위를 폐하려 하였다. 이어 윤(閏) 5월 또다시 세자를 둘러싸고 여러 말들이 나돌게 되었다.
영조는 즉위초 탕평책(蕩平策)을 펼쳤으나, 즉위 과정에서 노론의 도움으로 즉위한 것과 경종 독살설,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노론4대신이 세자시절의 영조를 지지하던 과정에서 사형당하는 등 친노론적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고, 그는 주로 소론의 편을 든 것도 부자관계를 악화시킨 원인으로 추정된다.
결국 노론을 상징하는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뒤주 속에서 세자를 가두어 굶겨 죽게 했다. 사망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정조는 1777년(정조 1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아버지의 시호를 상시하였다.
한편 세자가 비밀리에 도움을 청했던 조재호 등은 위리안치 후 사사되었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현위치(경기도 수원시)로 옮겨진다.
사후 [편집]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정조는 1776년(정조 원년) 즉위하자마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발언을 했다. 또한 수은묘(垂恩墓:무덤명)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垂恩廟:사당명)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려 국왕의 생부로서 존대했다. 그 후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영조가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 것은 종사를 위해 결단을 내린 후 은정을 베푼 것라고 영조가 말한 바 있다. 사도세자가 살인을 수시로 한 것은 자신이 직접 반성한 기록이나 죽은 사람들의 이름, 영조의 말 등을 볼 때 일부 사실로 추정된다.
(사도세자는) 정축년·무인년(영조33~34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영조실록》영조38년 윤5월13일자 기사 중
1899년(광무 3년) 임금으로 추대하여 장종(莊宗)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라고 하였다. 무속에서도 장조를 왕자신(뒤주대감)으로 모신다.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가족 관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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