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표가 죽고 대를 이은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유비는 올 데 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 제갈량은 동오의 손권에게 가서 그를 설득해 유비와 함께 조조에 맞서게 했다. 적벽대전(211년)에서 조조가 패퇴하자, 유비는 영릉, 계양, 장사를 점령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 때 익주의 유장이 장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유비를 초청하자, 유비는 이에 응해 가맹관에서 싸운 뒤 형주에서 온 제갈량의 군사와 함께 익주를 탈취했다. 익주와 형주를 차지한 유비는 스스로 황제를 칭했고, 제갈량은 승상이 되었다(221년). 그러나 형주의 귀속권을 두고 손권과 전쟁을 벌이다가 패배한 유비는 영안에서 숨을 거둔다(223년). 이 때 유비는 제갈량에게 “내 자식놈이 보좌할 만하면 그를 돕되, 부실하다면 그대가 스스로 황제가 되어 다스리라”는 말을 했고 이에 제갈량은 “온 힘을 다하여. 죽기까지 충성하겠습니다”고 대답했다(이 대답에서 <후출사표>의 유명한 문구가 비롯되었을 것이다).
225년, 승상에 익주목, 사예교위까지 겸하여 모든 나랏일을 관장하던 제갈량은 먼저 남중(南中)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 때 적장을 일곱 번 잡았다 일곱 번 놓아주는 아량을 베풀어 남중의 민심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내실을 다지고 후환을 없앤 뒤, 마침내 제갈량은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위나라 정벌에 나선다(227년). 228년 봄, 제갈량에게 위나라의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항복하면서 촉한군의 기세는 한때 하늘을 찔렀으나, 그가 아끼던 마속이 장합에게 크게 패하는 바람에 원정은 실패했다. 제갈량은 마속을 벤 다음 스스로 벼슬을 세 등급 깎아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네 차례(228년 겨울, 229년, 231년, 234년) 더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사마의를 비롯한 적의 방어를 깨트리지 못했다. 결국 234년 8월, 오장원에서 병사함으로써 유비와 제갈량의 오랜 염원은 물거품이 된다. 그의 아들 제갈첨이 아버지를 이어 무향후가 되고, 그의 부하 강유가 제갈량의 뜻을 받든다며 다시 북벌에 나섰지만 여의치 않았으며 제갈첨과 강유 사이에 분쟁까지 일었다. 이러는 동안 위나라에서 권력을 잡은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는 부하 등애를 보내 촉한을 공격했으며, 제갈첨이 맞섰지만 패배하고 전사했다. 수도 성도가 포위되자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함으로써(263년) 촉한은 2대 42년 만에 멸망했다.
"똑똑하기가 제갈량 못지않다"
이처럼 촉한은 오랜 중국 역사에서 아주 잠깐 존속했던 지방정권에 불과했고, 제갈량의 북벌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그의 명성은 죽은 직후부터 전 중국에 진동했다. 죽고 나자마자 그의 영묘(靈廟)를 세우자는 건의가 촉한 전역에서 빗발쳤으며, 나중에 위나라 군대가 촉한을 멸망시킬 때도 그 영묘에 제사를 지내고 제갈량의 무덤을 정중하게 지켰다고 한다. 위나라를 이어받아 천하를 통일한 진(晉)나라에서는 누군가의 재능을 칭찬할 때면 “똑똑하기가 제갈량 못지않다”는 말이 상투적으로 쓰였다고 하니, 제갈량의 명성이 단지 <삼국지연의>에만 기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의>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가 ‘완벽한 인간’, ‘신과 같은 사람’이었을까? 진수의 <삼국지>를 토대로 한 근대의 평가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제갈량은 ‘정치가-행정가’로서의 기량은 탁월했어도 ‘군사전략가-지휘관’으로서의 기량은 그렇게까지 뛰어났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연의>에는 그가 유비에게 등용된 직후 벌어진 장판파 전투에서 유비군이 패배한 이유는 워낙 유비군의 병력이 열세였고 피난민들을 모두 데려가야 한다고 유비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조조군은 전체적으로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정예병은 수천에 불과했고, 유비군은 수만의 병력이었다. 게다가 장판파에 도착한 조조군의 선발대는 숫자도 5천이었고 수백 리를 쉬지 않고 행군해온 터라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런데 여지없이 패배했던 것이다. 그것은 제갈량의 군사지휘 역량이 부족했거나, <연의>에서 묘사된 것과는 달리 당시에는 아직 유비 진영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에 있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한 후 조조와 벌인 전쟁에서도 <연의>에는 늘 제갈량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작전지시를 하고, 유비는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에는 “유비가 출정하면 제갈량은 후방에서 식량과 군수물자 수송을 담당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제갈량이 <출사표>를 쓰고 북벌에 나섰을 때, “위나라에서는 그동안 촉한에 유비 한 사람만 있는 줄 알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제갈량이 병력을 몰고 나오니 당황했다”라고 한다. 실제의 제갈량은 ‘천재적인 군지휘관’보다 ‘믿음직한 행정가’로서 유비에게 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이 지휘권을 행사한 것이 분명한 다섯 차례의 북벌에서도 <연의>에서처럼 다 얻은 승리를 ‘무능한 부하, 어리석은 군주, 불운함’ 때문에 놓치는 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애초에 인구나 물자에서 위나라의 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던 익주만을 가지고(게다가 관우, 장비 같은 맹장들도 사라진 상태로) 위나라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면, 제갈량은 천재 전략가는커녕 몽상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북벌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유비가 내린 사명을 받들기 위한 몸부림”이거나 “계속적인 공격으로 위나라가 정비할 틈을 주지 않는, 방어로서의 공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전쟁 목표는 제갈량의 성격과 결부되어, 과감함과 임기응변이 결여된 신중한 작전으로 이어졌다. <연의>에서도 이런 사실은 얼핏 드러난다. 병력이 없는 상태로 사마의의 대군을 맞았을 때, 제갈량은 성문 위에 앉아 태연히 금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를 본 사마의는 “제갈량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저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다”며 퇴각한다. “언제나 조심스럽다”는 것이 제갈량 군대의 장점이자 큰 단점이었다. 처음 출정할 때 우회로를 택해서 단숨에 장안을 공략하자는 위연의 계책을 물리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한 ‘위대한 바보’
하지만 군사적 재능은 과장되었어도, 제갈량은 분명 다재다능했으며 보기 드문 역량을 갖고 있었다. 촉한군의 열세를 보완하고자 그가 창안했다는 팔진도, 목우유마, 연노 등은 성능이 과장되기는 했으되 실제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 방식이나 <제갈량집>에 나타난 사상을 보면 그는 유가와 법가를 적절히 조화시켰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는 법가의 장점과, 인간적인 대우를 통해 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유가의 장점을 그는 모두 살렸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다”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서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예정된 병사들에게 돌아가라고 함으로써, 병사들이 감격하여 전력으로 싸워 이겼다”는 에피소드는 원칙을 냉정히 지키며 따뜻한 인간미를 잃지 않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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