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4.20 14:17 | 수정 : 2013.04.20 14:55
- 무용교실 캔버스에 유채. 1874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그는 아주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질로 악명 높았다. 드가를 만찬에 초대했던
유명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얼마나 유별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잠깐만요. 저한테는 버터를 넣지 않은 요리를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식탁에는 꽃을 꽂지 말고,
저녁식사는 7시 반 정각으로 해주세요. 댁의 고양이가 식탁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주시고,
손님들도 개를 데리고 오지 않게 해주세요. 초대 손님 중에 여성이 있다면 향수를 뿌리지 말고
와달라고 해주세요. 아참, 조명은 아주 약하게 해주세요. 아시다시피 제가 눈이 아주 안 좋아서요.”
게다가 드가는 이 저녁식사에서 어린아이가 포크로 접시를 두드린다는 이유로 고함을 질러
아이를 기겁시켜 울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는데,
아주 위트 있고 재미 있는 입담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드가는 어린이, 강아지, 꽃을 싫어했다. 무엇보다 그는 미장트로프(misanthrope), 즉 인간을 혐오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드가의 인간 혐오에는 여성 혐오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방어적이었던 그는 결국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런 그가 어린 여자무용수들을 그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주 가까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어린 소녀들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드가의 무희 그림은 그들과 친밀하지 않으면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마치 창녀들과 동고동락을 했기에 가능했던 툴루즈 로트렉의
카바레 그림과 비슷하다. 아마 드가는 처음부터 무용수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고전음악을 아주 좋아했고,
오페라극장의 관현악단 연주자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페라극장에서의 공연을 자주 관람하게 되었던 것! 더군다나 화가로서
형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발레 공연이 곧 움직이는 드로잉이라고 느껴 더욱 더 매혹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되자 드가는 오페라극장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연간회원권을 구입했다. 당대 상류층 사람들은 연간회원권을 구입해 오페라극장의 주요 좌석을 차지했다.
그들은 단순히 공연을 볼 수 있는 1층 앞자리나 귀빈석뿐만 아니라 무대 옆 공간이나 기둥 사이사이의 은밀한 공간, 공연 시작 전이나 막간 혹은 끝나고 나서
배우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배우휴게실 등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드가 역시 무대뿐 아니라, 탈의실, 대기실, 연습실 등 무용수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쫓아가서 스케치할 수 있었다
- 푸른 옷을 입은 무용수들 19세기 후반. 파스텔화. 푸슈킨 미술관 소장
상상한 것을 더해 그렸다. 그것은 드가가 원하는 정확한 묘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오페라극장에서 무용
오디션이 있는 날, 들어가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디션 장면을 그리기는 했는데, 실제 장면을
본 적이 없어서 부끄럽다”는 겸손한 부탁과 함께! 그리하여 1870년대 초반부터 발레 그림을 부쩍 많이 그리기
시작했는데, 무대 위의 무희들을 그린 그림도 있지만, 그보다는 발레 연습과 휴식 장면을 더 많이 그렸다.
사실상 드가가 이런 무희 그림에 천착하게 된 것은 단순히 발레 동작의 미학적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그
를 더욱 매혹시켰던 것은 무대 뒤 무용수들의 은밀한 세계였다. 예컨대 우아한 백조의 수면 아래 천박한
발길질처럼, 피나는 노력을 숨기도록 훈련받는 무용수들의 실상에 더욱 끌렸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아름답고,
육감적이고, 우아하고, 고상한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긴장감과 피로, 숨어있는 고통 등에 신경이 쓰였다.
뿐만 아니라 드가는 그녀들을 둘러싼 남성 관람객들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더욱이 ‘무대 뒤의 은밀함’이란 무용수들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과 관련된다. 당시 무용수들은 주로
노동계층에서 선발되었고, 일곱 여덟 살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정식교육을 받지 않아 글을 읽거나
쓸 수 없었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일주일에 엿새씩 늦은 저녁까지 수업과 연습에 몰두했다.
무용수들의 엄마들 또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들 중 대다수는 드가가 즐겨 그리던
세탁부들이었다.
그들은 집안살림을 갉아먹는 딸들을 위해 가장 밑바닥 직업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인데, 딸을 젊은 무용수로
키우는 것만이 노동계급의 가난에서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늘 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딸의 처녀성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비싼 값을 부르는 고객(후원자)을 찾을 때까지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오페라를 세련된 탐욕과 겁 많고 헐벗은 희생자를
엮어주는 곳에 비유했다. 돈 많은 후원자들은 발레리나를 마치 우리에 갇힌 사냥감이나 시녀 정도로 여겼던 것! 한 전직 무용수는 “일단 오페라에 들어오고 나면
창녀로서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곳에서 고급 창녀로 길러지는 것”이라고 탄식했다.
드가만큼은 무용수들 앞에서 반듯하게 행동했다. 그는 무용수를 비롯한 모델과 잠자리를 같이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드가는 오페라극장 단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레단을 자신의 가족처럼 느낀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한 무용수가 돈이 없어 힘들어 하자 영향력이 있는 친구에게 그 무용수를
잘봐 달라고 부탁을 하는가 하면, 모델 한 명이 결핵으로 죽어갈 때에도 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무용수들은 그런 드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드가가 자기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고마워하며,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 무용수는 “조용하고 친절한 노인으로 눈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파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층계참에 서서 오가는 무용수들을 그리곤 했는데,
지나가는 무용수들에게 잠깐만 멈춰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렇게 서 있는 동안 재빨리 그 모습을 스케치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하여 드가가 포착해낸 무용수들은 거식증에 걸린 오늘날의 무용수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자기 몸을 핥는 고양이처럼 무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단단하고 건장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런 그림은 드가와 모델의 물리적 거리는 아주 가까웠지만, 심리적 거리는 조금 소원했음을 드러낸다.
심리적 거리란 최소한의 환상을 유지해줄 수 있는 거리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드가가 그녀들을 섹슈얼리티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혐오주의자 드가의 사랑법 혹은 취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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