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美術산책

[98] 장미꽃 우거진 정원에서… 몰랐네, 세상 바뀐 줄 -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yellowday 2013. 3. 6. 15:32

입력 : 2013.03.04 03:04 | 수정 : 2013.03.04 03:51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밀회'…1771~1772년, 캔버스에 유채, 317.5×243.8㎝, 미국 뉴욕 프릭 컬렉션 소장
분홍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서 젊은 남녀가 은밀하게 만난다. 한껏 멋을 낸 청년이 대담하게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연애편지를 읽고 있던 아가씨는 가슴 뛰는 만남의 순간에 인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란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 구(舊)체제 안에서 온갖 호사와 향락을 즐기며 세상 변하는 줄 몰랐던 귀족들의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1732~1806)의 작품이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던 프라고나르는 루벤스와 렘브란트 같은 과거 거장들의 화풍(畵風)을 익혔다. 그는 미묘한 빛과 색채의 변화를 능숙하게 포착하고 과감하게 붓을 놀려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려냈다. 그 속에서 아슬아슬한 연애담이 펼쳐지니 귀족들 구미에 딱 맞았던 것이다.

그림 '밀회(密會)'를 주문한 이는 루이 15세의 후궁으로, 사치스럽기로 악명 높던 뒤바리 부인이다. 그녀는 왕이 하사한 대저택을 장식할 그림을 프라고나르에게 맡겼다. 완성작은 '사랑의 과정'을 그린 네 편 연작(連作)으로, '밀회'는 그중 하나다. 그러나 당시 엄격하게 절제된 신고전주의 미술이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서 프라고나르의 예쁘장한 그림은 이미 한물간 구식으로 여겨졌다. 결국 뒤바리 부인은 완성작을 거부했고, 이후 프라고나르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 이 그림은 1915년에 미국의 철강 재벌 헨리 클레이 프릭이 금융가 J.P. 모건한테서 구입한 이래 그의 개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프릭은 최고의 예술 애호가로 손꼽히지만, 미국인이 몹시 증오하는 기업가 중 하나로 늘 거론될 만큼 악랄한 기업주로 알려져 있다. 어쨌거나 '밀회'는 대중이 미워하는 주인을 만날 운명이었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