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 국보순례

[41] 지증대사 적조탑비

yellowday 2011. 4. 3. 18:46

세밑에 새 국보가 탄생했다.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智證大師) 적조탑비(寂照塔碑)'가 보물 138호에서 국보 315호로 승격된 것이다. 지증대사(824~882)의 일대기를 담은 이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최치원이 짓고, 분황사의 83세 노스님 혜강이 쓰고, 새겼다. 최상의 비석돌로 손꼽히는 보령 오석(烏石)에 새긴 것이어서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획 끝 하나 변하지 않고 윤기 나는 까만 돌 속에 글씨가 하얗게 드러나고 있다. 여초 김응현은 남한에 있는 금석문 중 으뜸이라고 했다.

대사의 본명은 도헌(道憲)이다. 불과 아홉 살 때 어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부석사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는 운수행각의 고행에 나섰다. 그런 중 숲길을 지나는데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친 사람이 그 깨달은 바를 나중 사람에게 나눠줌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며 사라졌다. 스님은 그 뜻을 받아 계람산 수석사에서 법회를 여니 대중이 대밭처럼 빽빽이 들어찼다고 한다. 스님의 명성이 높아지자 경문왕이 "새가 자유로이 나무를 고르듯이" 찾아와 달라고 초대했지만 "진흙 속에 편히 있는 나를 화려한 강물에 띄우지 마십시오"라며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날 문경에 사는 심충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희양산 봉암(鳳巖)계곡의 자기 땅에 절을 지어 달라고 하자 가보고는 "여기에 스님이 살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되리라" 하며 절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암사다. 헌강왕이 등극하면서 "좋은 인연은 같이 기뻐하고, 먼지구덩이는 온 나라가 같이 걱정해야 한다"며 스님의 가르침을 구하자 서라벌 월지궁(月池宮;안압지)으로 가서 한차례 설법을 베풀었다.

그리고 다시 봉암사로 돌아가고자 하니 왕은 눈길이 미끄럽다며 한사코 붙잡다가 결국 가마 한 틀을 내주었다. 그러나 스님은 지팡이를 짚고 가며 병자가 생기거든 태우라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자신이 병에 걸려 그 가마에 실려 절집으로 돌아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을 최치원은 이렇게 적었다.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빠졌도다."(星回上天 月落大海) 나라에서는 '지증'이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사리탑에는 '적조'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래서 이 비의 이름이 '지증대사 적조탑비'로 된 것이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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