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1962년>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숲으로 상징되는 자연은 신의 영역이다. 우리는 숲에서 신을 느낀다. 가을은, 봄은, 계절은 도시로 오지 않고 숲으로 스미지 않던가. 숲에 들 때마다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박재삼(朴在森). '박달나무 숲에 살다', 나는 그 이름을 이렇게 마음속으로 번역해 부르곤 했다. 그 이름이 생각날 때마다 숲에서 걸어 나오는 한 인간을 상상하곤 했다. 그렇다고 산신령 같은 이미지로서는 아니다. 그저 순한 웃음기를 온몸에 입힌, 어눌한, 그래서 간절히 순리에 입각한 한 시인.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천년의 바람〉 중)라고 노래하는 걸 보면 역시 숲의 시민, 바람의 이웃임에 분명한 시인.
사랑을 나무에 비유하면 어떤 나무가 될까? 박재삼 시인에게 사랑의 비유는 감나무다. 허나 그 감나무 여염하지 않다. '제대로 벋을 데가 저승밖에 없는' 나무다. 이승에서는 다 못할 사랑 아닌가. 게다가 그 사람의 등 뒤로나 벋어나가는 혼자의 사랑이다.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 마지막으로 '휘드려지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빛이 되는 사랑은 '한(恨)'에 다름 아니다. 한 치의 원망도 절망도 없는, 마음의 순리를 따라가서는 마침내 '느껴운 열매'가 되는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성실'히 이승을 살게 하는 근원적 동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한 깊은 눈으로 얻어낸,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은 아픔일지 모른다는, 질문이며 동시에 독백인,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라는, 리듬을 보라. '그것을 몰라,'와 '그것을 몰라!'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속울음과, 아득함을, 서편제의 계면조 같은 '한(恨)'을 보라.
실은 감나무는 가장 흔한 우리네 유실수다. 그럼에도 가을 어느 하루 이웃의 마당가에 잎을 떨구며 서 있는 감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우리는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 수 없다. 그 모습은 인간의 전생애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그래서였던지. 화가 근원(近園 김용준)과 수화(樹話 김환기)가 이어 살았던 집의 이름이 '노시산방(老枾山房)'이요, 박용래의 집도 '홍시(紅枾) 있는 골목'이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울음이 타는 가을강〉 중)는 가을이다. '서러운 사랑 이야기'가 골목마다, 오솔길마다, 지붕마다 '지글지글 타는' 가을이고 그 '등성이'에 우리는 지금 서 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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