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詩 사랑詩

[20] 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yellowday 2012. 11. 23. 07:04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1997년>

▲ 일러스트=이상진

먼 남녘에서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벗에게서 카드 메일이 왔다. 열어보니 정호승 시인(1950-)의 시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안치환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노래에 잠긴다. 시에 잠긴다. 시가 그대로 노래인, 어둔 밤 눈물 같은 이 반짝거림. 내 어린 벗은 요즘 정호승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다고 한다. 아주 아주 낡은 책에서 좋은 냄새가 난단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세상에 나온 시집을 읽고 있는 열여섯 살 소녀. 시가 세상에 와 어느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길은 참으로 신비다. 그 애에게 답 메일을 보냈다. 거기에 정호승의 시로 만들어진 노래 중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부치지 않은 편지〉를 동봉했다. '(…)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 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백창우가 곡을 만들고 김광석이 부른 노래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진다. 소주를 딱 한잔만 하고 싶어진다.

정호승 시인에게서 나는 종종 구도자의 느낌을 받는다. 사랑의 화두를 온몸으로 짐 진 채 전 생애를 걸고 떠난 구도행. 슬픔, 그리움, 절망, 외로움, 희망, 사랑, 이런 단어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그는 데뷔 이래 세 번이나 스스로 시업(詩業)을 쉬었다. 이 공백기들에 그는 참담한 절망을 건너온 듯하다. 절망이 깊어도 끝내 사랑을 버릴 수 없었던, 아니, 오직 사랑에 의지해 캄캄한 터널을 통과해온 구도행의 정점에 이 시가 있다고 할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해인사 큰스님의 법어에서 충격을 받고 기어이 시로 빚어진 이것은 죽음도 불사한 사랑의 의지다. 순도 높은 '오직 사랑'이다. 낮고 그늘진 변두리 사람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가슴 싸한 슬픔으로 번지던 시편들에서 7년의 공백을 거쳐 나온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는 극한의 고통을 통과해 나온 자리에 핀 한 떨기 붉은 열매처럼 오롯하다. 진저리친다. 이 조용한 구도자의 사랑법은 온몸이다. 정호승의 사랑은 스스로 등신불이 되고자 한다.

'아직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 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지 / 미나리 다듬듯 내 마음의 뼈다귀들을 다듬어 / 그대의 차디찬 술잔 곁에 놓아 드리리 / 마지막 남은 한 방울 눈물까지도 / 말라버린 나의 검은 혓바닥까지도 / 그대의 식탁 위에 토막토막 잘라 드리리' (〈모두 드리리〉부분) 사랑이 부박해져가는 시대이지만, 소름 끼치도록 염결한 사랑의 의지가 세상 한 녘에서 이렇게 타오르는 한 오라, 절망아, 사랑은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고야 말 것이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