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石의詩 모음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이-백석

yellowday 2012. 11. 13. 23:45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이-백석



오늘은 정월(正月) 보름이다
대보름 명절인데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

옛날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먼 타관에 나서 이 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일가 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련만

나는 오늘 때묻은 입든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어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옛날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고향 사람의 조그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고 한 그릇 사먹으리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옛날로부터 대대로 이 날엔 으레히 그러하며 오듯이
먼 타관에 난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 날은 그 어느 한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飯館)을 찾어 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든 본대로 원소(元宵)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면서 이 마음이 맑은 옛 시인들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을
외로이 타관에 나서도 이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아득하니 슬펐을 듯이

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로다
아, 이 정월(正月) 대보름 명절인데
거리에는 오독독이 탕탕 터지고 호궁(胡弓)소리 삘삘 높아서

내 쓸쓸한 마음엔 자꾸 이 나라의 옛 시인들이 그들의 쓸쓸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나 이백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려나 이것은 옛투의 쓸쓸한 마음이다

객고 : 객지에서 당하는 고생.
억병 : 술을 매우 많이 마시는 모양
맛스러운 : 맛이 없는
반관(飯館) : 음식점.
원소 : 원소절에 먹는 떡.
느꾸어 : 느꺼워. 그 무엇에 대한 느낌이 가슴에 사무쳐서 마음에 겨운
오독독 : 화약을 재어 점화하면 터지는 소리를 자꾸 내면서 불꽃과 함께 떨어지게 만든 것.
호궁 : 중국 전통 현악기의 한가지. 모양은 바이얼린과 비슷하며, 대나무로 만들어 뱀껍질을 입혔음.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