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아미동 부산대학병원
6개월간의 병원생활이 시작되고
드디어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직접 간호를 할수 없어 퇴원을 할 동안 간병사를 고용했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이는 몇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기에 그럴때마다 나는 외출증을 끊어 아픈 몸을 이끌고
대학병원으로 갔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나오면 돌아 오곤 했다.
그러길 2주쯤 되었을때 시어머니께서 돌아 가셨다.
설상가상, 엎친데 덮친격, 하늘도 무심하였다.
그이는 응급 침대에 누운채로 지하에 있는 영안실로 시어머니 장례절차를 밟으러 내려 가야했다.
할 수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참석하는걸로 소임을 다할뿐이었다.
장지에도 가지 못하고, 더군다나 맏상주 노릇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8형제나 되어 우리가 아니라도 모든 일을 잘 처리해 주었다. 고마웠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내가 퇴원을 하고 그이 간호를 직접 할려고 간병사를 내 보내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간병사가 내게 인상을 쓴다. 나가기 싫다는 표현을 하는것이다.
그이의 상황은 식사는 물론, 양치질, 생리현상, 몸의 청결문제등 모든걸 간병사에게 맡기고 있었던 처지였다.
모름지기 간병사란 환자가 필요할때만 돌봐 주면 되는데 느닺없는 행동에 약간 의아심을 느꼈었다.
한 달을 돌보고 있었으니 그새 아마도 정이 든것 같았다.
(이런 현상은 환자의 회복에 정신적 도움이 될것 같아 추궁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 사이 점차 회복이 되어 일상생활로 돌아 갈수가 있었다.
20년 가까이 운영해 오던 서예학원을 정리하고, 하루 아침에 사고와 더불어 백수가 되었다.
오전에는 운동과 물리치료를 하고 병원으로 퇴근하는 생활이 6개월동안이나 지속 되었다.
작은 올케가 지극정성으로 토요일만 되면 반찬을 준비해 가져다 주었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식성엔 별 문제가 없어 걱정은 없었다.
우린 장기간의 휴가를 얻어 병원에서 쉬고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사 설립공신이라 월급도 그대로 나오고 각처에서 위로금도 적잖게 들어 왔었다.
더 다행인것은 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회복에만 신경을 쓰면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 기간만은 장남이라는 무거운 짐까지도 내려 놓을수 있었다.
내가 소록도에 봉사를 하러 간 시기도 이 때였다..........계속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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