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

yellowday 2012. 8. 13. 18:47

입력 : 2012.08.12 22:42

2000년 원주여중 2학년 손열음이 독일 남부 예술도시인 에틀링겐에서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1등을 했다. 2년마다 열리는 에틀링겐 콩쿠르는 '15세 이하'와 '20세 이하'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재주를 다툰다. 열음이는 참가자 중 가장 어렸다. 열음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도 영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등을 했고, 그때도 최연소였다. 열음이는 오벌린, 비오티 콩쿠르에서도 제일 어린 나이로 1등을 했다. 이름 앞에 '최연소'란 말을 달고 다녔다. 그게 도전이었다.

▶열일곱 살 문지영이 지난주 에틀링겐 콩쿠르에서 우승을 따냈다. 심사위원들은 "음악적 상상력이 17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고 했다. 지영이 부모는 지체장애 2·3급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한 달에 정부 지원 80만원을 받는다. 지영이는 예술중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아놓고도 돈이 없어 입학을 못했다. 집엔 피아노도 없다. 흡사 골프선수에게 골프채가 없었던 셈이다. 지영이는 동네 교회와 학원을 돌아다니며 하루 8시간씩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 신동 김선욱도 열여섯 때인 2004년 에틀링겐 무대에서 꽃을 피웠다. 손열음(26)·김선욱(24)·문지영(17)은 에틀링겐 콩쿠르 우승자이자 셋 다 국내파라는 공통점이 있다. 신수정·한동일·백건우 같은 대선배 피아니스트들이 외국의 유명한 스승과 학교를 거쳤다면 후배 손·김·문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대진 교수를 스승으로 모셨다. 형편이 어려운 영재들에겐 한국메세나협회가 마련한 특별 콩쿠르가 있었다. 지영이도 그곳에서 대상을 받아 김대진 교수와 연결됐다.

▶요즘 이집저집 피아노 치기 싫다며 투정부리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거실엔 몇 년째 피아노가 놓여 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보낼 때면 엄마는 달래다가 윽박지르느라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지영이는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엄마를 졸라 여섯 살 때부터 건반 앞에 앉았다. 스승 김대진은 "지영이는 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늘 목말라 있었다"고 했다. 지진이 난 땅에서도 멋지게 피어날 장미는 스스로 물을 찾는 법인가.

▶영문학자 장영희는 1급 지체장애였다. 장 교수는 암이 재발하자 "바닥에 쓰러질 때마다 겨드랑이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는 손길을 느꼈다"고 했다. 올림픽에서 리듬체조 5위를 차지한 손연재는 슈즈가 벗겨지자 맨발로 연기했다. 울퉁불퉁 굳은살에 피멍 든 오른발 사진이 뭉클했다. 우리는 연재의 굳은살과 피멍에서 삶의 힘을 얻는다. 한때 사회가 지영이를 보듬어준 것 같지만 실은 지영이가 우리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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