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7.02 22:35
1990년대 중반까지도 흔히 '소르본대'라고 부르던 파리4대학에서 친구가 박사 논문을 발표한다 해서 찾아간 적이 있다. 빅토르 위고가 다녔던 학교인데도 교수 연구실이 없었다. 좁은 공간을 잘게 쪼개다 보니 교수 방을 마련해주질 못했다. 유학생들이 지도교수 부름을 받고 찾아가면 학과 사무실에 붙은 조그만 도서실이었다. 재정이 거덜나 지우개 대신 바닥 걸레로 칠판을 닦았다. 창밖으론 아시아 관광객들이 깃발 든 가이드를 따라가며 강의실 안을 흘끗거렸다.
▶파리 4대학은 졸업식도 입학식도 없었다. 미국 대학들과 달리 '세러모니'를 싫어하는 유럽 전통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학생들은 "아마 행사 비용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박사 논문이 통과됐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는 나중에 학과 사무실에 찾아가 A4 용지에 찍힌 학위증을 받아오는 것이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룻장 복도는 이 학교를 세운 13세기 로베르 드 소르본 신부가 지르는 비명이라고도 했다.
▶명문 소르본대가 파리4대학으로 바뀐 뒤 캠퍼스 풍경은 프랑스 대학 교육의 변화를 상징한다. 20세기 초 미국을 둘러보고 온 유럽 교수들은 미국 대학이 형편없다는 보고서를 냈다. 2차대전 후 미국은 고학력 노동력을 얻으려고 대학 재정을 든든히 뒷받침했다. 반면 유럽 대학은 60년대 후반까지 어떤 변화도 없었다. 1968년 '학생혁명'을 겪고 난 파리 국립대들은 해체·재편을 거쳐 대학 이름을 1~13번까지 번호로 불렀다. '공짜 등록금' 대학에 10년 넘게 다니는 학생이 수두룩했고 노벨상 교수들은 미국으로 빠져나갔다.
▶작년 영국 대학 평가 기관 QS가 발표한 세계 대학 100위 안에 미국은 31개, 영국은 19개, 프랑스는 달랑 2개였다. 프랑스 대학은 2006년부터 세계 20위 안에서 사라졌다. 민주당이 그제 서울대 폐지론을 들고 나오면서 모델로 꼽은 것이 프랑스 국립대 캠퍼스 체제다. 민주당은 이런 충격요법 없이는 고칠 수 없을 만큼 학벌주의와 입시 경쟁이 심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분야에서 서울대가 1등이고, 다른 대학들이 2등을 놓고 다투는 시스템을 고치겠다면 맞장구칠 일이다.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도 한동안 엘리트 교육기관인 국립행정학교 '에나(ENA)'를 "불태워라"고 목소리를 돋웠지만 늘 흐지부지됐다. 좌파 시사 잡지들도 '에나 폐지론'을 단골 특집 기사로 다루곤 한다. 맨 꼭대기에 있는 교육기관을 없애면 학벌 없는 세상이 실현된다는 꿈을 흔히들 꾼다. 그 꿈을 좇아 프랑스를 따라가서는 진짜 꿈만 꾸다 끝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