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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구역에서 물금행 무궁화호 기차로 갈아타자 그제야 몸이 좀 편해졌다. 촌스럽게도 KTX 열차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열차가 덜컹거리며 느릿느릿 달리자 그제야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고, 이어폰을 꽂고 여행 기분을 냈다.
마침 라디오에서는 구슬처럼 튀는 여성 보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상의 단편소설 <봉별기>의 마지막 구절은 금홍이가 부르는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 그늘진 심정(心情)에 불 질러 버려라’라는 창가(唱歌)로 끝맺는다.
- ▲ 천성산 화엄늪 산철쭉은 늪에 피어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철쭉은 봄의 화룡점정이자 절정이다. 철쭉꽃 떨어지면 봄이 진다. / 사진 이이철 아웅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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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실제로 기생 금홍이와 살림을 차렸고, 소설처럼 그녀와 애절한 이별을 했다. 여기에 반해 탄생한 노래가 ‘속아도 꿈결’이고, 이 노래가 다시 필자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소설에서 결말 못지않게 인상적인 장면은 ‘스물세 살이오~ 삼월이오~ 각혈이다’라고 시작하는 첫 구절이다. 죽을병에 걸린 이상의 속마음이 계절과 대비되면서 절묘한 가락으로 울리는 절창이었다.
5월이면 양산 천성산(千聖山·922.2m) 화엄늪(화엄벌)은 이상의 각혈처럼 붉은 철쭉이 연초록 습지를 울긋불긋 물들인다. 비록 4월 취재인 탓에 꽃은 없지만,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처럼 애잔한 봄날의 산행이다.
- ▲ 무지개폭포로 가는 어영골 초입. 길섶에 새순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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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부산 산꾼의 단골 코스, 무지개폭포 들머리
열차가 밀양역을 지나자 산세는 점점 수려해지고 삼랑진에서 낙동강을 만났다. 낙동정맥은 낙동강 동쪽을 흐르는 산줄기다. 천성산은 그 주맥으로 북쪽에는 정족산(700.1m)~영축산(1,092m)~신불산(1,208.9m)~가지산(1,240m)이 이어지고, 남으로 경부고속도로 너머 계명산(601.7m)~금정산(801.5m)이 연결된다. 우리나라 산줄기 체계의 우수한 점은 산과 물의 흐름을 통일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낙동정맥의 마루금에서 능선 서쪽(왼쪽)으로 떨어진 물은 모두 낙동강으로 흘러들게 된다.
- ▲ 어영골 초입 길섶에서 만난 하얀 남산제비꽃이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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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금역에 내리자 양산의 산악문화를 이끄는 이상배씨가 마중 나와 있다. 이번 취재도 상당 부분 그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 천성산을 즐겨 찾고 누구보다 그곳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철쭉산행은 그동안 답사하지 않았던 웅상읍 어영골 무지개폭포 입구 원점회귀 코스로 잡았다. 천성산의 철쭉 명소인 화엄늪과 철쭉제 축제장을 포인트로 무지개폭포, 원효암 등을 넣는 꽤 괜찮은 길이다.
이튿날 아침, 웅상읍 장흥저수지 옆 간이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에 나선다. 취재팀으로는 이상배씨와 그의 제자 격인 정명숙씨, 그리고 취재진과 함께 내려온 배병달씨가 뭉쳤다. 산 좋고, 날씨 좋고, 사람까지 좋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등산로 안내판을 지나자 비포장도로가 나오며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절로 나오는 휘파람 불며 숲길을 통과하니 보은사 앞에서 콸콸~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다. 의외로 큰 계곡과 풍부한 수량에 입이 쩍 벌어진다.
“천성산은 곳곳에 계곡이 진짜 좋습니더. 특히 우리가 한등계곡이라 부르는 산하동계곡은 엄청 길고 멋져요. 소금강이에요, 소금강.”
틈만 나면 이상배씨의 천성산 자랑이 이어진다. 고향 산에 대한 애정이 철철 넘친다. 사실 천성산은 충분히 자랑할 만하다. 높이 1,000m가 채 안 되는 산이 일명 천성공룡능선으로 대표되는 첩첩 산줄기를 자랑하고, 능선 사이로는 암반 깔린 계곡에서 옥구슬처럼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그래서 예로부터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불렀으며 ‘산세가 높고 험준하며 맑고 빼어나게 아름다워 천 가지 연꽃 같다(山卒率靑秀 千朶芙蓉)’는 찬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 ▲ 3단으로 쏟아지는 무지개폭포. 물줄기와 거대한 소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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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의 마지막 식당인 무지개산장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산길이 시작된다. 호젓한 오솔길을 따르다 다시 만난 계곡에는 봄기운이 가득하다. 노란 생강나무꽃이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길섶에는 봄의 전령인 얼레지와 현호색이 무리지어 피었다. 계곡을 건너다가 살짝 발이 빠졌지만,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봄기운 담뿍 담긴 계곡물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아기자기한 산길은 곧 무지개폭포 갈림길을 만난다. 여기서 어영골을 그대로 따르면 은수고개에 올라붙는다.
왼쪽 무지개폭포 방향을 따르면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다. 산비탈에는 굴참나무가 가득하다. 이곳의 풍성한 가을빛을 예감하며 길을 따르면 무지개폭포 앞이다. 이정표를 따라 계곡으로 조금 내려서면 커다란 바위 뒤편에 숨은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무지개폭포는 총 3단 폭포로 10m 높이 중간쯤에서 한 번 물줄기가 튀고, 넓은 소에 갇힌 물이 다시 쏟아지면 마지막 3단을 구성한다.
폭포에서 다시 산비탈로 올라가면 급경사 산길이 기다리고 있다. 한동안 코가 땅에 닿을 듯한 비알을 오르면 길이 순해지면서 작은 억새밭이 나온다. 그곳에 이름 없는 작은 습지가 보인다. 천성산은 화엄늪, 밀밭늪 등을 비롯한 여러 습지대를 품고 있어 더욱 신비롭다. 여기에서 잠시 한숨을 돌린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배병달씨가 입을 연다.
“어떻게 숨소리가 안 나요?”
“대장님 따라다녔더니 이렇게 됐네요.”
정명숙씨는 이상배씨를 쳐다보며 웃는다. 정명숙씨의 산행하는 모습을 보면 단박에 고수의 풍취가 느껴진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다시 몸을 추스르고 길을 나서면 싱싱한 대숲이 나타난다. 길은 대숲을 관통해서 나 있다. 그 길을 지나면 몸에 연초록 물이 들 것 같다.
대숲이 끝나는 지점에 녹차밭이 있고 집이 보인다. 이 자리가 문헌에 나온 죽림사지로 추측된다. 평산리 지명 유래에 의하면, 죽림사에 하도 많은 과객이 몰려 허드렛일을 하는 시자가 사자목에 있는 바위를 깨뜨리면 과객이 줄어든다 해서 바위를 깼더니, 비둘기 세 마리가 날아가고 절이 망했다고 한다. 절은 망했지만 푸른 대나무밭은 여전하다.
죽림사지를 지나면 줄곧 오르막이다. 길 양편으로 연분홍 꽃을 피우는 키 큰 철쭉나무들이 군락으로 자라고 있다. 5월이면 화사한 꽃 터널이 생기리라. 다시 한동안 숲길을 따르면 갑자기 도로가 나와 어리둥절하다. 천성산 정상에 군부대가 있을 때 생긴 군사작전도로다. 지금은 이 길로 원효암 셔틀버스가 다닌다. 도로를 따라 10분쯤 오르면 원효암으로 들어선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원효가 창건한 원효암은 전국에 산재한 10여 개의 원효암이라는 이름의 암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원효를 비롯한 많은 고승이 머물면서 수행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암자 위로 부처를 닮은 바위들이 흩어져 있어 신비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 ▲ 1 천성산 정상 아래로 이어진 화엄늪 일대는 3만8,000평에 이르는 거대한 늪지다. / 2 천성산 정상 아래로 이어진 화엄늪 일대는 3만8,000평에 이르는 거대한 늪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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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늪에서 펼쳐진 원효의 화엄경 강론
마침 공사 중이라 산만한 원효암을 지나쳐 양산 시내가 한눈에 잡히는 자리에서 점심 도시락을 풀었다. 봄기운 가득 받은 취재팀의 얼굴에는 누구 하나 피로한 기색 없이 생기가 돈다. 컵라면, 막걸리, 과일 등이 어우러진 단출한 만찬을 즐기고 다시 길을 따르면 곧 갈림길이다. 직진하면 홍룡사로 내려가고, ‘화엄늪 1.4㎞’ 이정표 방향으로 천성산의 옆구리를 타고 간다.
길은 마치 비밀 장소로 이어진 듯 원시적인 오솔길이다. 길섶에는 철쭉나무들이 가득하다. 아기자기한 바위 너덜지대를 지나 작은 언덕에 오르자 시야가 넓게 열리면서 화엄늪 초원능선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