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태공주 지하묘에서 발견되는 벽화
2012/2/18
오늘은 서안시내에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건릉과 법문사를 다녀오기로 하였다. 그곳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잘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여행사에 일일관광을 신청하였다. 아침 7시에 중국인 가이드를 호텔 앞에서 만났다. 그녀는 나를 중형버스로 어느 곳엔가 데려가 늘 그랬듯이 다시 큰 버스에 모집된 관광객들 속으로 밀어 넣었고, 30여분을 기다린 후 건릉으로 출발하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봉우리가 보이면 그것은 산이 아니고 황제의 능이라고 한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평평한 지역을 약 한시간여 달려간 후에 도착한 곳이 건릉이었다. 먼저 도착한 곳은 건릉박물관이었다. 이 박물관에는 영태공주의 지하묘가 있었다. 영태공주는 측천무후의 손녀딸로 중종의 7번째 딸이다. 그녀는 17세에 난산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지만, 실제로는 측천무후의 노여음을 사서 교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영태공주의 지하묘에는 당나라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의장도, 궁녀도, 천체도 등의 당대의 벽화가 현재까지 남아 있어 유명하다.
영태공주 묘 입구
지하로 약 150미터 정도를 내려가야 한다
통로의 천정에 그려진 문양
벽화
영태공주의 석묘. 정말 시신이 들어 있을까?
영태공주의 지하묘로 내려 가는 길은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약 150여미터 지하로 내려가는 길의 양편에는 당대의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렇게 훼손 되어가는 벽화를 좀 더 주의 깊게 보호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관광객들을 맞이 한다는 것이 좀 의아했다. 지하길의 마지막에는 조그만 방이 있었고 그 속에 커다란 석관이 놓여 있었다.
건릉박물관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건릉에 도착하였다. 이 건릉은 당고종과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합장묘로 서안 서북의 건현에 위치한다. 이 건릉은 통상적인 황제의 능처럼 흙을 쌓아 만든 봉분이 아니라 산에 구멍을 내어 그 산 전체를 능으로 만들었고, 그 구멍을 완전히 막아 들어 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 아직도 도굴되지 아니한 황제의 능이다.
건릉 참도
오른쪽으로 작게 보이는 비가 측천무후의 무자비.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였던 측천무후의 인생은 비정하고 상식을 벗어난 그러한 생애였다. 장안에서 태어난 측천무후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여 그 아버지 무사확은 그녀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636년 당태종이 무측천의 용모가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14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다소 거칠고 애교를 부릴 줄 모르는 곰과(熊科)여서 좀처럼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그녀의 성격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무측천이 궁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태종이 후궁들을 데리고 성질이 포악한 사나운 말을 보러 갔다. 그 말을 보면서 태종이 “누가 저 말을 제압할 수 있겠느냐?“ 하니 무측천이 나서며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 제게 쇠채찍과 철퇴, 그리고 단검을 주십시오. 먼저 말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다스리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치겠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단검으로 저놈의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장례에 참석한 61개 외국 사신의 상. 모두 목이 달아나 있다.
이렇게 거친 성격을 가진 무측천이니,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여 12년간 황궁에 있으면서 태종의 자손을 한명도 낳지 못하였다. 649년 태종이 죽자 당시의 관습에 따라 황실의 절 감업사에서 비구니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이 절을 방문하였던 당고종이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에게 반하여 그녀를 승적에서 빼내어 자기의 후궁으로 만들었다. 나중에 측천무후의 손자인 당현종도 이러한 전통(?)에 힘입어서인지 자기 며느리(이후 양귀비)를 빼내어 자기 귀비로 삼았으니, 궁중의 질서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궁으로 돌아온 측천무후는 당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4남2녀의 자식을 두었다. 고종의 자식이 모두 12명인데, 6명의 자식을 두었으니 고종의 총애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정권 찬탈과정에서 잔혹한 살상과 천륜을 위배하는 만행을 스스럼 없이 저질렀다.
그녀는 자신이 갓 낳은 딸을 죽이고 당고종의 정실황후인 왕씨가 죽였다고 모함하여 왕씨를 폐위시킨 후 자신이 정실 황후가 된다. 폐위된 왕씨에게는 곤장 백대를 친 다음 잔인하게 두다리를 잘라서 산채로 술항아리에 넣고 고통스럽게 죽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왕씨의 아들을 몰아 내고 자신의 장남을 태자로 내세웠다.
당고종은 병약하여 대부분의 정치를 측천무후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고종이 병약함을 이유로 태자에게 황위를 넘기려 하니, 장남을 독살하고 둘째 아들을 태자에 올렸다. 태자들로 인하여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날 것을 우려한 측천무후는 둘째 아들도 여색을 탐한다고 모함, 태자자리에서 폐위시켜 추방하고 후에 다시 그를 독살하고 만다. 그 후 당고종이 죽자 측천무후의 셋째아들이 황제가 되는데 그가 바로 중종이다.
중종이 황제에 오른 후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으로 알았으나, 자기 멋대로 움직이자 그를 폐위시키고 넷째아들을 황제로 만들었는데, 그가 바로 예종이다. 그러나 이후에 예종도 폐위시키고 자신이 스스로 황위에 올라 나라 이름도 당에서 주(周)나라로 바꾸고 690년부터 705년까지 15년간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여황제로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녀는 만년에 이르러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 줄 것을 고려하다가 당황조의 황태후로 돌아 가기로 하여 폐위되었던 셋째아들 이현을 태자로 책봉하였다.그녀가 죽은 후 중종이 다시 황제에 올라 국호를 다시 당으로 고치고, 나라이름도 바꾸었던 측천무후를 아버지 고종과 합장을 시켰다고 한다. 그 측천무후가 누어 있는 곳이 바로 이 건릉이다.
건릉의 꼭대기로 올라 가려면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왼쪽편에 측천무후의 무자비가 조그맣게 보인다
건릉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500미터에 달하는 참도(參道)를 걸어 올라가면 고종의 장례에 참석한 외국사절과 헌상된 동물을 본 뜬 석상들이 길게 세워져 있었다. 참도의 끝에는 61개의 외교사절단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등부분에 국적이 적혀 있었으나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에 모두 지워 졌고, 목도 모두 잘려져 있었다. 그 속에는 신라에서 온 사신의 모습도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석상인지는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참도의 끝에서도 약 1km이상을 올라야 건릉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데, 가이드가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하여 정상까지 올라 갈 수 없었다. 인간이 정치적 권력을 이용하여 부릴 수 있는 사치의 극한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30여분 그곳에 머무른 후 다시 버스에 올라 법문사를 향하였다
출처:조선닷컴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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