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세이키 <지,감,정> 1899년, 캔버스에 유채(구로다기념관 소장)
쿠로다 세이키 (黑田淸輝) |
메이지 ( 明治 )26 년 (1893) 7 월 , 2세의 서양화가 쿠로다 세이키는 9 년에 걸친 프랑스 유학을 맞치고 귀국했다 . 법률가에 뜻을 두고 프랑스에 건너갔으나 그림에 흥미를 갖게되면서 문화의 중요성과 자신의 자질을 발견 , 화가로 전향하였다 . 외광파의 사롱화가 라파엘 코란을 스승으로 아카데믹한 회화교육을 받아 明治 24 년 < 독서 > 로 사롱에 입선. 쿠로다를 맞아들이면서 일본의 양화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된다 . 그전까지 明治 9 년 개교의 공부미술학교 ( 美術學校 ) 에서 이탈리아인 화가 폰테네제가 지도했던 바르비종파풍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 었던 당시의 화단에 , 쿠로다는 변화하는 빛과 대기의 미묘한 모습을 분할하여 그리는 밝은 색조의 외광파풍의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 이러한 쿠로다의 화풍은 신파 ( 新派 ), 자파 ( 紫派 ) 라고 불리어 곧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갔다 . 뿐만 아니라 쿠로다는 서양미술의 전통에 근간을 둔 인체 표현을 중시한 나체 데생을 회화제작의 기초로서 정착시켜 갔다 . 당시 나체화를 공적인 장소에서 전시하는 것은 도덕상 유해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 明治 29 년 동경미술학교에 신설된 서양화과의 지도를 맡으면서는 해부학과 실제의 나체모델을 이용한 인체 데생을 교육과정에 도입하였다 . 쿠로다가 인체 연구를 중시한 것은 “ 구상화 ( 構想畵 ) ” 가 회화의 최고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서양에서는 포즈 등에 의해 특정한 의미나 개념을 상징하는 인물상을 조합하여 신화나 역사 , 사랑과 용기 등의 주제를 나타내는 회화가 가장 격이 높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 쿠로다 역시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귀국후 얼마 있지 않아 일본의 주제와 모티브를 도입한 < 옛날 이야기 >, < 지 • 감 • 정(智 • 感 • 情)> 등 구상화 제작에 힘썼다 . 明治 31 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교수로 취임한 후에는 明治 40 년에 개설된 문전 ( 文展 ) 을 위해 진력 , 明治 43 년 제실기예원 , 타이쇼 ( 大正 )2 년 국민미술협회회장 , 9 년 귀족원위원을 역임하는 등 말년에는 미술교육자 , 미술행정관으로서의 활략이 중심을 이루었다. yellowday 옮김 |
'藝文史 展示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글라스 낀 고종황제 등 19C 말 사진 최초 공개 (0) | 2012.04.09 |
---|---|
직원은 싫어하지만, 관광객은 좋아하는 건물 (0) | 2012.04.03 |
이혜순의 함께하는것들 2011' - B (0) | 2012.04.03 |
보디가드 광고에 웬 청양고추? (0) | 2012.03.31 |
최북(崔北) /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 (0) | 2012.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