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3.27 22:59
1991년 여름 경남 통영 앞바다 작은 섬에서 나흘짜리 소설창작교실이 열렸다. 둘째 날, 강사로 온 소설가 윤후명과, 그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수강생이 결혼식을 올렸다. 소설가 정연희가 온 섬을 헤매며 산유화를 꺾어 와 신부의 부케를 만들었다. 소설가 이호철이 주례를, 시인 이근배가 사회를 봤고 축가도 소설가 유현종이 불렀다. 김주영은 문우(文友)의 새 출발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예식은 조촐했지만 진심 어린 축하가 쏟아진 문단 축제였다.
▶결혼은 축제다. 우리 옛 결혼식도 동네가 왁자지껄한 마을 잔치였다. 신부집 마당이 식장이고 식당이고 놀이판이었다. 친척과 이웃들은 형편 따라 술 한 단지, 떡 한 시루, 달걀 몇 꾸러미씩을 부조(扶助)로 들고 왔다. 신부댁은 갖가지 빛깔의 색떡을 대청에 죽 늘어놓아 화환처럼 장식했다. 누구라도 결혼을 축하할 수 있었고 누구라도 흥에 겨워 먹고 마시고 놀다 갔다. 그 시절 '열린 결혼식'은 1950년대 전문 예식장이 등장하면서 갇힌 공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6·25 뒤 서울에서 처음 생긴 결혼식장이 관훈동 종로예식장이었다. 공회당처럼 밋밋한 실내에 의자만 줄지어 들였지만 면사포 쓰고 신식 결혼식을 올릴 수 있어서 인기를 끌었다. 그 뒤로 세월이 가면서 결혼식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아졌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자란 시인 정일근은 둘째·셋째 고모가 시집가던 날을 제일 신났던 잔칫날로 기억한다. 그는 "결혼식이 축제였던 시절은 끝난 지 오래다. 청첩장이 세금 고지서 같고 뷔페 식권 같다"고 했다.
▶결혼은 축제다. 우리 옛 결혼식도 동네가 왁자지껄한 마을 잔치였다. 신부집 마당이 식장이고 식당이고 놀이판이었다. 친척과 이웃들은 형편 따라 술 한 단지, 떡 한 시루, 달걀 몇 꾸러미씩을 부조(扶助)로 들고 왔다. 신부댁은 갖가지 빛깔의 색떡을 대청에 죽 늘어놓아 화환처럼 장식했다. 누구라도 결혼을 축하할 수 있었고 누구라도 흥에 겨워 먹고 마시고 놀다 갔다. 그 시절 '열린 결혼식'은 1950년대 전문 예식장이 등장하면서 갇힌 공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6·25 뒤 서울에서 처음 생긴 결혼식장이 관훈동 종로예식장이었다. 공회당처럼 밋밋한 실내에 의자만 줄지어 들였지만 면사포 쓰고 신식 결혼식을 올릴 수 있어서 인기를 끌었다. 그 뒤로 세월이 가면서 결혼식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아졌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자란 시인 정일근은 둘째·셋째 고모가 시집가던 날을 제일 신났던 잔칫날로 기억한다. 그는 "결혼식이 축제였던 시절은 끝난 지 오래다. 청첩장이 세금 고지서 같고 뷔페 식권 같다"고 했다.
▶도시에서 예식장 말고 혼례 올릴 곳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찾기 나름이다. 교회·성당·구청·공공도서관이 있고, 어릴 적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도 훌륭한 대안이다. 한적한 야외에는 좋은 곳이 더 많다. 신랑·신부와 양가 부모가 마음을 합쳐 체면과 겉치레만 벗어던지면 된다. 청첩장을 '살포'할 필요도 없고 하객을 양껏 불러모을 일도 없다. 그러면 파주자연학교 결혼식처럼 누구나 하객으로 가고 싶어할 한판 결혼 축제를 벌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