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공산당이 매도했던 당 태종, 부활의 키워드는 '用人術'

yellowday 2011. 10. 21. 11:26

적까지 끌어안은 소통의 달인, 만년엔 아첨꾼에 둘러싸여 약중독으로 숨져

당태종 평전
자오커야오·쉬다오쉰 지음|김정희 옮김|민음사|688쪽|3만5000원

"모든 간부와 지도자들은 '물(백성)은 배(군주)를 띄우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당 태종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횡령과 부패를 일삼는 자들은 어떤 영역이나 사람 그리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히 처벌할 것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한 말이다. 차기 주석으로 꼽히는 시진핑(習近平) 부주석도 당 태종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는 늘 위징(魏徵)이 직언을 한 용기를 칭찬한다. 하지만 당 태종 이세민이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위징의 담(담력)이 열개였을지라도 그가 목숨을 걸지 않는 한 감히 직언을못했을 것이다."

문화혁명 당시 폭군 수 양제보다 더 음험하고 교활한 통치자로 매도됐던 당 태종 이세민(599~649)이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에서 성군(聖君)의 전형이자 공산당 지도부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까지 떠오르고 있다. 중국 푸단(復旦)대 역사학과 교수 출신들이 쓴 '당태종 평전'은 태평성대의 전형으로 알려진 '정관(貞觀)의 치(治)' 주역인 당 태종 이세민의 생애를 치밀하게 보여준다.

이세민은 뚜렷한 공적 없이 제위(帝位)를 물려받은 2세가 아니라 수(隋)나라의 지방관이었던 아버지 이연을 도와 당 왕조를 세운 공동 주역이었다. 617년 봉기부터 이듬해 당을 창건하고, 이후 7년간 경쟁 세력들을 물리치고 통일전쟁을 완수할 때까지 직접 전장에 나서 군사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군사능력과 정치력은 '현무문의 변'으로 알려진 정변을 통해 태자인 형과 동생을 제거하고 제위에 오르는 바탕이 됐다.

민음사 제공
적까지 끌어안은 포용력과 용인술은 당 태종의 최고 덕목으로 꼽힌다. 태종과 함께 '정관의 치'를 연 위징, 왕규, 위정은 원래 태자였던 형 건성의 신하들로 한때 태종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이었다. '현무문의 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태종이 "왜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했느냐"며 위징을 추궁하자 위징은 태연히 "황태자가 만약 신(臣)의 말을 따랐다면 분명 오늘의 화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태종은 주군에 대한 위징의 충성심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했다.

왕조 창업기에 다양한 인재들을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과감하게 등용한 덕분에 태종의 휘하에는 늘 사람들이 넘쳤다. 제위에 오른 뒤에도 태종은 신하들의 직간(直諫)을 장려하고, 간관(諫官)을 중용해서 신하·백성들과 소통에 힘썼다. 그런 태종도 재상 위징의 잔소리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분을 못 참은 태종이 "언젠가 이 시골 늙은이를 죽여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황후 장손(長孫)씨가 "군주가 밝으면 신하도 곧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위징이 곧은 것은 폐하께서 밝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은 즉시 노여움을 풀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태종 또한 재위 후반에 들어서면 직간을 회피했고, 아첨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종은 나이가 들면서 방사(方士)들이 만든 단약(丹藥)을 복용하면서 장생을 추구했고, 결국 인도 출신 방사가 만든 단약을 먹다가 중독돼 숨졌다.

태종의 언행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역대 군주의 '제왕학 교과서'로 널리 읽혔다.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성계를 비롯, 성종·정조·순조가 '정관정요' 강론을 들었다. 세조는 직접 '정관정요'의 주석을 달았고, 영조는 서문을 쓰는가 하면 신하들에게 이 책을 들고 조정에 들어와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조선왕조실록'엔 이 책이 43번이나 등장한다.

이 책에서 불편한 대목은 당 태종이 봉건 지주계급의 대표자라거나 또는 농민봉기를 진압한 잘못이 있다는 식의 계급투쟁 사관 흔적이다. 마르크스주의 사관(史觀)에서 자유롭지 않은 1984년에 간행된 시대적 제약 때문일 것이다. 당 태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으로 고구려 정벌 과정에서 얻은 질병을 들면서도 정작 고구려 정벌 자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도 아쉽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