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이 한장의 글씨] 아파트, 서예가 되다

yellowday 2021. 6. 16. 05:01

서예가 김충현 탄생 100주년展

정상혁 기자

입력 2021.06.15 03:00

 

 

/일중선생기념사업회

 

명필은 낱말을 가리지 않는다.

서예가 일중 김충현(1921~2006)이 큰 붓을 들어 써내려간 글씨 ‘水晶아파트’를 보면 알 수 있다.

화선지에 쓴 단출한 다섯 글자가 한글과 한자 고유의 조형미를 품은 채 견고히 건축돼있다. 전시장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孔雀아파트’ 글씨도 일중은 남겼다. 미술계 관계자는 “모두 1976년 여의도에 준공된 아파트인 것으로 미뤄 당시 건설사(한양주택) 부탁으로 써준 글씨로 추정된다”고 했다. 서울 백악미술관에서 7월 6일까지 열리는 일중 김충현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볼 수 있다.

 

좋은 글씨는 그 자체로 좋은 디자인이었다. 전국에 일중이 쓴 현판·비문·시비만 700여점, 옛 삼성그룹 제호 ‘三星’처럼 그가 그은 획에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이 담겨있다. ‘水晶아파트’ 밑에 놓인 붓글씨 ‘天馬콘크리트工業株式會社’ ‘東亞印刷工業株式會社’ 역시 서예가 골방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밀접히 호흡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조선일보에 ‘궁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발표하는 등 이미 10대 때부터 우리 고유 서체에 사명감을 드러내고 한글 서예의 확장에 크게 기여한 거장의 얼굴을 송영방·김기창 등 동료 화가들이 초상화로 남겼다. 시(詩)·서(書)·화(畵)가 전시장에서 서로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