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긱 이코노미(Gig Economy)는 기업이 정규직보다 필요에 따라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경향이 커지는 경제 상황을 지칭하는 말로,
자존감으로 버텨낸 조선시대 검서관들 2013.07.05 10:04 https://www.ahnsamo.kr/1566839 |
김 영 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
전통시대의 신분 사회가 과연 다 지나갔을까? 새로운 차별과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소시민들의 마음은 사시사철, 여전히 힘들다. 대한민국 경제지표가 어떻든 간에, 대부분의 개인은 치솟는 물가를 감당하기 버겁다. 박봉이라도 좋으니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만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고 다녔으면 하는 것이 ‘꿈’일 정도이다. 나이 60이면 건강도 괜찮고 이력도 붙어서 해볼 만한데 정년에 걸린다. 그나마 이것도, 정규직에게 주어진 행복한 고민들이다. 비정규직, 임시직, 계약직 등을 일일이 따져보면 그 규정하는 개념들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아픔의 출발점은 대략 비슷하다. 근시안적인 일자리 창출이 빚어낸 구조로 인해 철저하게 ‘갑’에게 유리할 뿐이다. ‘을’의 입장에선 그저 불안하기만한 이 고용형태는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마저 매정하게 가져가 버린다. 조선시대, 쉴 틈 없던 검서관(檢書官), 행복했을까? 정조(正祖)가 재임 기간에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서얼(庶孼) 문인들을 등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은 검서관 출신 실학자들이다. 아름다운 누대로 둘러싸이고 귀중한 도서들로 가득 찬 규장각. 화려한 궁궐에서 업무를 보게 된다면 그 역시 우아한 일이었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검서관은 30개월을 임기로 하는 임시직에 가까웠으며, 일종의 잡직(雜織)이었다. 규장각의 정식 관원들을 보좌하여 도서 편찬과 간행에 관련한 일들을 해야 했고, 궁궐 안팎의 행사 준비에 불려 다녔다. 특히 며칠에 한 번씩 궐내에서 숙직하는 일은 이들의 업무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든 예로 꼽힌다. 초정 박제가가 숙직하면서 지은 시 「출직(出直)」에, “나흘에 한 번 집에 들어가는데/ 늦은 귀가는 언제나 해질 무렵[四日一歸家, 歸晏日常晡]”이라는 구절이 있다. 박제가보다 후배 문인이었던 대산(對山) 강진(姜溍; 표암 강세황의 庶孫이다.)도 「원석(院夕)」이라는 시에서, “검서직 이어가길 바라지만/ 녹봉 헤아리니 주유(侏儒)에게도 부끄럽다[檢書成脈望, 量祿愧侏儒]”라 하였다. 이들은 시를 통해, 검서관 생활이 명예롭기는 하지만 과중한 업무량이나 박봉과 같은 현실적 문제가 함께 존재한다는 고충을 토로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적어도 프로라는 자부심과 명예라도 있었다. 업무를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비단 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일자리 구조가 필요 조선시대와 우리가 사는 현재의 경제구조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비정규직, 임시직, 계약직들에게 명예만으로 버텨내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 현 정부 역시 이러한 고용 구조 해결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눈치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시행될지 아직 가늠하기 어렵지만, ‘시간제 정규직’ 방안을 내놓은 것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정규직이 아닌 이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불안함과 서러움이다. 꼭 돈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일자리 창출에 앞서 고정적인 보수 이외의 요건, 즉 어떠한 위치에서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최소한의 자존감을 보장해 준다는 가치적 의미도 고려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