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샤갈 "전체주의의 선전도구 되지 않겠다"… 獨·佛·美 유랑의 삶

yellowday 2018. 9. 21. 07:12

입력 2018.09.21 03:13

샤갈 "전체주의의 선전도구 되지 않겠다"… 獨·佛·美 유랑의 삶

러시아 예술 영웅 샤갈, 세계는 왜 그의 작품에 열광하나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Chagall·1887~1985)은 러시아가 세계에 자랑하는 예술 영웅이다. 러시아는 4년 전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자국 알파벳 숫자에 맞춰 소개한 33명 가운데 샤갈을 칸딘스키·말레비치와 함께 미술 분야 대표 인물로 꼽았다. 

샤갈이 1922년 조국을 등질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역사적 반전이었다.

볼셰비키혁명(1917년)으로 탄생한 소련은 예술가들에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따르라고 강요했고, 저항하는 이들을 

핍박·살해했다. 샤갈은 예술의 자유를 찾아 독일, 프랑스, 미국으로 유랑했다. 그 와중에 평생의 연인이던 아내 벨라를 잃었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샤갈, 러브 앤 라이프'전(展)을 관람했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테마는 단연 사랑이다. 벨라를 향한 애정을 꽃에 둘러싸인 남녀로 표현한 샤갈의 1937년 작 '연인들'은 이 전시 최고의 인기작이다. '전체주의의 선전 도구가 되라'는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지켜낸 샤갈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도 또 하나의 관람 포인트다.

샤갈과 가족 - 러시아를 떠나 독일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 샤갈이 1924년 파리 자택에서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부터 딸 이다, 아내 벨라와 샤갈.
샤갈과 가족 - 러시아를 떠나 독일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 샤갈이 1924년 파리 자택에서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부터 딸 이다, 아내 벨라와 샤갈. /국립 이스라엘미술관
샤갈의 고향은 현재 벨라루스 땅인 비테프스크. 이번 전시작 중 하나인 '비테프스크 위에서'를 샤갈은 1915년부터 1920년 사이에 여러 버전으로 그렸다. 랍비 차림의 유대인 남자가 눈 덮인 겨울, 고향 마을 위 허공을 배회하는 그림 속 장면은 머지않아 그가 겪게 될 고난과 유랑을 예언하는 듯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만 해도 샤갈은 차르(황제) 시대의 고루한 사실주의 화풍을 벗고 새로운 실험을 전개할 좋은 기회라며 반겼다. 비테프스크 민중 미술학교 교사가 된 그는 외쳤다. "프티 부르주아들이 앙심을 품고 떠들든 말든 상관 말자. 우리는 새로운 무산(無産)계급 화가들이 노동자들로부터 곧 나타나길 희망한다."

◇소련과 나치 독일에서 모두 배척당해

'러브 앤 라이프'전에서 멀티미디어 방식으로 전시 중인 '산책'(1917~18)과 '흰색 칼라가 달린 옷을 입은 벨라'(1917)는 공산 혁명에서 미술의 혁신을 찾으려 한 샤갈의 비원이 깃든 작품이다. '산책'에서 샤갈은 손잡은 벨라의 몸을 붉은 깃발처럼 허공에 흔들며 밝게 웃고 있다.

1918년 예술인민위원으로 비테프스크에서 혁명 승리 1주년 축하 행사를 맡은 샤갈은 볼셰비키 관료들과 불화하기 시작했다. 혁명가들 눈에 샤갈은 너무 자유분방하고 개인적이었다. 뒤집힌 채로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다니는 동물 그림을 본 볼셰비키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그린 동물들은 마르크스·레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도시 곳곳에 내건 축하 리본과 현수막엔 "비테프스크 전체에 사용한 리본이면 속옷 5000벌을 만들 수 있겠다"며 비웃었다.

샤갈의 손을 잡은 벨라가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는 ‘산책’(1917~1918·왼쪽)과 전쟁으로 인한 유대인의 고통을 그린 ‘대핍박’(1941~1945).
샤갈의 손을 잡은 벨라가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는 ‘산책’(1917~1918·왼쪽)과 전쟁으로 인한 유대인의 고통을 그린 
‘대핍박’(1941~1945). /국립 이스라엘미술관
1922년 5월 독일로의 출국을 전후해 지인들의 죽음이 잇따랐다. 아내 벨라의 처가가 약탈당한 뒤 손위 동서가 피살당했다. 소련에 남아 있던 샤갈의 아버지는 트럭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독일로 피신한 샤갈은 이듬해 나온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제국주의 러시아도 소비에트 러시아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낯선 자이다"라고 썼다.

1937년 3월엔 러시아에 남아 있던 그의 스승 유리 펜마저 비밀경찰에 살해당했다. '변절자' 샤갈이 보낸 안부편지의 수신인이라는 게 이유였다. 샤갈은 그런 조국에 돌아갈 수 없었다.

유대인인 샤갈에게 독일도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나치는 표현주의, 큐비즘, 추상파, 초현실주의 등 실험적이고 난해한 모든 미술에 반대했다. 1937년 3월엔 피카소, 몬드리안, 칸딘스키, 클레, 샤갈 등의 그림을 모아 뮌헨에서 '퇴폐 미술전'을 열면서 "이 부패한 취향이 얼마나 독일인의 정신을 파괴했는지 보라"고 했다. 나치는 독일에 남아 있던 샤갈의 그림 중 '찡그린 자화상' 등을 이 전시에 포함하며 '얼굴의 자조적인 분위기가 유대인의 비뚤어진 정신을 드러낸다'고 선전했다.

◇프랑스에서도 검거당하자 미국으로 탈출
샤갈 연보

1940년 6월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에 들어선 비시(Vichy) 정부는 그해 8월 유대인을 공직과 학계에서 내쫓는 반(反)유대인 법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4월 유대인의 프랑스 시민권 박탈을 위한 정부 조직이 구성됐다. 프랑스로 이주해 시민권을 받은 샤갈도 여기에 포함돼 검거됐다. 간신히 풀려난 그에게 프랑스도 안전한 나라가 아니었다. '러브 앤 라이프' 섹션2에 전시 중인 '대핍박'은 그가 미국으로 도망가며 그렸다. 2차세계대전의 불길에 갇힌 유대인이 겪는 고통을 표현했다. 1948년 샤갈은 평화를 되찾은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벨라를 감염병으로 떠나보낸 뒤였다.

샤갈은 1950년대 이후 스테인드글라스에 정성을 쏟았다. 1962년 예루살렘 하다사 병원의 유대교 회당을 장식한 작품 '성서'를 제작하며 "성경 읽기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마주하는 것"이라 했던 노(老)예술가의 목소리가 스테인드글라스 불빛 너머로 들리는 듯하다. 전시는 9월 26일까지. (02)332-8011.


20세기초 러시아는 세계 '추상미술의 수도'… 천재 화가들의 엇갈린 운명


20세기 초 러시아는 세계 추상미술의 수도(首都)였다. 하지만 소련은 1922년부터 대대적인 '예술 정화' 작업을 벌였다. '추상미술은 대중과 분리됐고 퇴폐적이다'는 이유에서였다. 추상미술의 창시자로 러시아 국립예술원 교수였던 칸딘스키 등 많은 화가가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 혁명 신봉자였던 말레비치는 조국에 남았다가 큰 시련을 겪었다. 사각형·원형 등 단순한 형태를 회화의 가장 순수한 요소로 여기는 '절대주의'를 창시한 그는 풍부한 색감으로 개인적 감성을 표현하는 샤갈을 공격하고 절대주의만이 사회주의 혁명 이념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말레비치를 퇴폐적 정신 놀음에 빠져 이해 불가능한 그림을 그리는 몽상가로 여겼다. 당국은 1930년 독일 예술가와 접촉했다는 트집을 잡아 그를 체포했다. 조사 후 풀려난 말레비치는 이후 초상화를 그리거나 찻잔과 도기 주전자 등 '생산적인' 제품을 제작하며 연명했다.

다른 예술가들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강요당하며 체제 선전과 개인숭배에 동원됐다. 스탈린을 떠오르는 아침 해로 표현한 

작품 '조국의 아침'(1948)을 그린 슈르핀이 대표적이다. 소설가 복거일씨는 '자유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예술'에서

 "전체주의에서 예술은 선전·선동의 수단이 되는 한도까지만 존중받고 허용된다"며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권력을 지닌 

소수의 전제(專制)적 정치가 되고 개인숭배에 빠지므로 작가는 권력을 칭송하는 일만 하게 된다"고 썼다.


※참고한 책: '샤갈'(재키 울슐라거), '20세기 미술사'(로즈메리 람버트), '20세기 미술사-추상미술의 창조와 발전'(김현화), 

'미술로 보는 20세기'(이주헌), '자유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예술'(복거일 등)       출처 : http://new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