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廣開土王陵碑文 解釋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出生而, 有聖德鄒牟王奉母命, 駕巡行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생각해보면 옛날에 시조인 추모왕이 기틀을 처음 만들 때, 북부여로부터 나왔다. 하느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서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추모왕은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서, 수레에 말을 붙여 타고 순행하여 남으로 내려갔다. 길이 부여 엄리대수를 지날 때, 왕이 나루터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바로 위대한 하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엮고 거북이를 띄워라.」소리에 응하여 곧 갈대를 엮고 거북이를 띄웠다. 그런 후 건너가게 되었다. 비류곡의 홀본 서성산 위에서 도읍을 세웠다.
不樂世位, 因遣黃龍, 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龍負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 傳至十七世孫。
세상의 지위를 좋아하지 않아 이로 인하여 (하늘에서) 황룡을 보내 아래로 내려보내어 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왕이 홀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이 업어 하늘로 올라갔다. 유언을 받은 세자인 유류왕은 도로써 다스림을 일으켰다. 대주류왕은 기틀이 되는 업적을 이어받았다. 전하여 내려온 것이 17대손에 이르렀다.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恩澤洽于皇天, 威武振被四海, 掃除九夷,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豐熟。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랐고, 호는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은혜로움과 윤택함이 하늘에 푹 젖었다. 위엄과 위력으로 온 천하에 (영향을)떨쳐 미쳤다. 아홉 오랑캐를 없애 그 업적(왕업)을 거의 편안하게 하였다. 나라는 부유해졌고, 백성은 번성했고, 오곡은 풍족하게 익었다.
昊天不弔, 卅有九, 晏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돌아가셔서 나라를 버리셨다.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옮겨 나가서 이에 비를 세우고 업적을 새겨 기록하여서 후세에 보였다.
◈신습한자
1)駕(가) : ①탈 것 ②탈 ③부릴(수레를 타고 말을 부림)
2)由(유) : ①말미암을 (겪어지나옴) ②좇을 ③부터
3)皇(황) : ①임금 ②클 ③훌륭할
4)葭(가) : 갈대
5)庶 : ①무리 ②여러 ③가까울
6)殷 : ①번성할 ②근심할 ③은나라
◈참고사항
1. 廣開土王陵碑(광개토왕릉비)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의 발전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를 열어놓은 광개토왕의 공훈을 찬양하여 세운 기념비이며,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릉비는 옛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의 동쪽 언덕에 서 있다. 우리의 실측에 의하면 이 비는 높이 6.34m, 4면이 각각 1.43~1.90m나 되는 거대한 4각주의 응회암 통틀로 된 것인데 과거 이러한 유형의 비로서는 실로 세계 최대의 것이다. 릉비는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연 14행, 제4면 9행이고, 각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08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3구분으로 구성되어있다.
①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 대왕의 행장(行狀)을 쓴 부분과 ②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정복사업의 구체적인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은 부분 ③광개토대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연호의 수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삼국사기가 13세기에 쓰여졌으며 일본서기는 8세기초에 쓰여져 일본역사서사가 삼국사기보다 앞서 있다고 주장했었지만 이 비문의 발견으로 인해 4세기의 고구려의 영광과 삼국의 역사서가 일본서기보다 300년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삼국의 역사서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비문인 것이다.
2. 廣開土太王의 業績 (광개토태왕의 업적)
서기 391년,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오른 고구려 19대왕인 광개토태왕은 재위 21년동안 고구려의 역사와 한민족의 역사를 크게 뒤바꿔 놓았다. 대표적으로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때부터 줄기차게 추진해온 고구려의 ‘대외팽창정책’을 계승하여 고구려 역사상 가장 눈부신 업적을 세웠다.
광개토태왕이 영토를 크게 넓히고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 건설이 가능했던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광개토태왕은 뛰어난 전력․전술가였으며 탁월한 외교능력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외 팽창 정책 못지않게 내치에서도 한 치의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선대왕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등이 갖춰 놓은 법과 교육, 문화 제도를 이어받아 백성들이 편안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자주적 인물이었다. 4~5세기 당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수많은 나라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던 시점에서 민족적 자부심과 자주성을 바탕으로 동북아 질서를 재편했다.
광개토태왕이 즉위 후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와 ‘태왕’이라는 호를 반포한 것은 동아시아의 패자로서 독자적인 천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했음을 말해준다.
3. 廣開土太王陵碑의 歷史的 意義 (광개토태왕능비의 역사적 의의)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나 삼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교섭사 연구에 있어 이 시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보다 부각되어야 할 것이며, 대왕의 훈적을 전하는 광개토대왕비도 자연히 이러한 시각에서 보다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능비가 재발견된 이후 그 연구는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을 해명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 온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능비는 참모본부를 비롯한 일본제국구의 관학에 의해 ‘임나본부’라는 허구를 토대로 한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로서 변조 제시되었던 까닭에, 이후 근 1세기동안 능비 연구는 고구려사를 해명하였다기 보다는 고대 한일관계의 주도권 논쟁을 둘러쌓는 공방으로 한일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다.
4. 일제의 廣開土王陵碑의 變造 (일제의 광개토왕릉비의 변조)
일본은 청 ․ 일전쟁 이후 한반도에 대한 지배 야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왜곡 작업에 돌입했다. ‘임나일본부설’이 그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4세기경, 일본의 야마토정권이 변한을 정복해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뒤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어 지배했다는 내용이다.
일제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광개토대왕비 비문 내용을 들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00新羅 以爲臣民” (영락5년, 신묘년기사)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속국)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에 조공을 받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부숴 속국으로 삼았다.
2) “十年庚子 敎遺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官軍方至 倭賊退 ()()()()()()()來背息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新羅城0城 倭滿 倭潰城大····” (영락10년,경자년 기사) (고구려가) 영락 10년인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서 신라를 (왜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 성을 지나 신라성에 이르렀을때 왜병이 성 안에 가득하였으나 관군(고구려군) 이 도착하자 왜적이 물러났다. ()()()()()()()()되돌아 추격하여 임나라가에 이르 러 성을 함락하니 성이 곧 함락되었다. 안라인(신라인) 주두군이···신라성···() 성····왜가 가득하였다. 왜는 성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비문에 대한 해석에 있어 문제점과 변조의 흔적들이 나타나면서 일본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됐다.
첫째, 신묘년 기사의 경우 일본이 내세우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은 쌍구가묵본과 석회탁본인데 비석위에 종이를 대고 직접 찍어내는 원석탁본에 비해 제작과정에서 조작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신묘년 기사에 나오는 ‘海’자의 경우 광개토대왕비 발견 당시의 원석탁본에는 마모가 심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데, 일본이 제시하는 탁본에는 이와 반대로 ‘해’자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 많은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부숴 신민(속국)으로 삼았다”는 일제의 해석은 한문의 어법에도 어긋나며(來渡海) 앞뒤의 문맥이 전혀 연결돼지 않는다는 것과 고구려왕의 공적을 기록하는 비문에 왜가 주체가 될 수 없으므로 오역이라는 주장이 많다.
바른 해석은 “왜가 신묘년에 (신라를) 침입해와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쳐부쉈다. 백잔(백제)이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경자년 기사의 경우를 보면 일본이 제시한 탁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00000000來’가 1981년 중국 정부의 정밀원석탁본에서 ‘0000000自倭’로 밝혀져 ‘來’일 경우 ‘추격하던 왜군’이라고 해석되는 부분이 ‘自倭’가 발견되면서 ‘추격당하는 왜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 일본에 제시한 탁본에서 나오는 ‘왜만왜궤(倭滿倭潰)’가 중국 정부의 정밀원석탁본에서는 ‘왜구대궤(倭寇大潰)’로 밝혀져 ‘가득 찬 왜군이 성을 무너뜨렸다’가 ‘왜구가 크게 깨졌다’로 뜻이 완전히 바뀌게 됐다.
결국 완전한 해석은 “(고구려군이) 왜군을 뒤로부터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공격하니 곧 (왜군이 있던 신라성이) 함락되었다. 안라인(신라인) 수자리 군사가 신라성 염성을 공격하자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일제의 비문 변조 사실이 이렇게 확연히 드러났지만 많은 수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고 국정교과서에도 그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출처 : 서예세상(삼도헌정태수)
글쓴이 : 서예세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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