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麗的 詩 ·人

낡은 집 / 이용악

yellowday 2017. 8. 11. 05:38


<낡은 집-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 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貿穀)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도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1938년 발표)



* 은동곳 : '동곳'은 상투를 튼 뒤에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물건. 금, 은, 옥, 산호, 밀화, 나무 등으로 만드는 데 관자와 함께 재료에 따라 부귀(富貴)의 정도를 드러내는 남자의 장신구이다.

* 산호관자(珊瑚貫子) :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 금, 은, 옥, 산호, 뿔, 뼈들로 만듦.

* 무곡(貿穀) : 장사하려고 많은 곡식을 사들임.

* 둥글소 : 황소의 방언으로 큰 수소를 말한다.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는 콩을 싣고 다니다가 늙어버린 수소를 일컫는다.

* 싸리말 동무 : 어렸을 때 마마를 함께 앓으면서 싸리말을 타고 나았던 친구. 죽마고우(竹馬故友)

* 짓두광주리 : 함경 방언으로 바늘, 실, 골무 헝겉 같은 바느질 도구를 담는 그릇, 받짇고리.

* 저릎등 : 방언인 '저릎'의 표준어는 '겨릎'으로 껍질을 벗긴 삼대. 따라서 '겨릎등'은 긴 삼대를 태워 불을 밝히는 장치이다.

* 갓주지 : 갓을 쓴 절의 주지 스님. 옛날에는 아이들을 달래거나 울음을 그치게 할 때 갓주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함. 어떤 이는 이 낱말을 '갖주지'의 오기로 보고 갖가지. 즉 가지가지의 방언이라고 해석함.

* 글거리 : 그루터기. 풀이나 나무 또는 곡식 따위를 베고 남은 밑둥. 그루. 나무나 곡식 같은 것의 줄기의 아랫 부분. 곧 돌보는 이 없어 황폐한 모습.


 

성격 : 서사적, 향토적, 상징적, 사실적, 설화적
어조 : 이야기 어투의 담담한 어조, 슬픔과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어조
제재 : 일제시대에 폐허가 된 털보네 가족의 낡은 집
주제 : 일제 강점하의 궁핍한 삶과 유랑민들에 대한 연민
          일제하 우리 농촌의 궁핍상과 민족의 비애
특징 :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
          일종의 액자식 구성으로 사실감을 높임
          한 가족의 일대기를 직설적으로 표현함
          향토적인 시어의 사용
          묘사적 표현
          간접 인용과 직접 인용의 삽입


1938년에 발표한 이용악의 시입니다.
이용악의 시 중에서 잘 알려진 시는 오랑캐꽃, 전라도 가시내, 북쪽 등이 있겠네요.
일제하 유이민의 참담한 삶과 궁핍한 현실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려낸 시인입니다.

이용악은 북한 문단의 중심부에서 활동했습니다.
전쟁 이후 전후 복구에 앞장서는 인민 영웅을 만들려는 북한의 문예이론에 맞춰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분단 이후에 북에서 활동한 시인은
학교에서 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업적에 비해 교과서에서 거의 볼 수 없었죠.
하지만 분단국가에서 북한체제에 맞추어 활동하는 문학을 아는 것도
문학사에 있어 의미 있는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최근에는 북에서 활동한 시인들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죠.


낡은 집은 화자가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은 친구네 가족의 이야기를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말하면서 비극적 정서를 표출하기보다
그 당시 민족의 보편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효과를 거뒀습니다.
객관적 시선으로 보게 하는 효과는 액자식 구성 방식의 특징이기도 하죠.
외부 액자 부분은 1, 2, 8연,
내부 액자 부분은 3연에서 7연까지가 되겠네요.

하나의 확실한 스토리가 있고, 길이도 긴 편이기 때문에
짧은 소설을 보는 느낌도 있습니다.
인물, 사건, 배경 등이 정확히 드러나고
사건을 서술하는 화자가 있으며
인과관계에 따른 구성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서사시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하네요.

이 시에서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부분은 두 구절입니다.
그 중 첫째는 마을 아낙네들의 이야기죠.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도 붙었으면 팔아나 먹지."
아무렇지 않게 차가운 이야기를 주고 받는 아낙네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겠죠.
자식을 낳아도 기쁘기는커녕 어떻게 먹여 살리나 하는 걱정을 할 수 밖에 없는
그 당시 슬픈 현실을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또 하나는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입니다.
어려서부터 마음 졸이며 살 수 없었던 아이가 키운
도토리의 꿈은 어떤 꿈이었을까요.
그저 가족들과 하루하루 먹고 자며 살아가고 싶은
소박하고도 작은 꿈이었겠죠.
털보네 아이와, 그 당시 그 나이 대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 대부분이 겪어야 했었던 비참하고 피폐한 삶을
털보네 가족의 이야기와 그들이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던 낡은 집을 통해
사실적으로 보여준 시입니다.
담담한 어조로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동족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여실히 드러나 
더 가슴을 움직이는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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