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것들만 상호관계성을 갖는다. 나무가 그렇듯이 뿌리는 대지로 열려 있고, 가지는 하늘로 열려 있다. 그 열림으로 나무는 대지와 소통하고 하늘과 교감한다. 맹아(萌芽)는 싹트고 인식의 부름켜는 성장한다. 생명은 약동하고, 눈은 시력을 확보한다. 우리도 열려 있어야 세상을 보고 세계를 발견한다. 관찰과 성찰 속에서 마침내 꽃을 피운다. 말하자면 꽃은 열림의 미학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것을 나는 ‘개화’라 한다.
지구온난화현상이 가속화되는 추세다. 그래도 겨울은 춥고, 입춘에도 때로 폭설이 내리며 한파가 닥친다. 모질수록 생명력은 끈질기고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눈 소식, 꽃소식이 함께 오는 곳으로 봄을 맞으러 간다.
지구온난화현상이 가속화되는 추세다. 그래도 겨울은 춥고, 입춘에도 때로 폭설이 내리며 한파가 닥친다. 모질수록 생명력은 끈질기고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눈 소식, 꽃소식이 함께 오는 곳으로 봄을 맞으러 간다.
1 한라산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들, 구름도 바람을 따라 함께 오른다. 2 한라산의 주인인 노루의 눈망울 속에는 우리가 갖지 못한 평화가 있다. |
흰 눈에 빛나는 구상나무 숲과 백록담
일찍 일어난 새의 마음이 이러할 것인가. 새벽녘 성판악에 도착한다. 랜턴을 켜고 산으로 든다. 묵묵한 시간, 어두워서 마음은 차분하고 걸음은 조심스럽다. 무엇을 살필 것인가.
이어지는 돌길의 감촉이 다르다. 눈길에 접어든 것이다. 안개처럼 어둠이 빠지며 화선지에 나타나는 설화의 숲, 한라산의 첫 장이 그윽하게 열린다. 그 사이 우리는 ‘사라오름’ 갈림길에 닿아 있다. 눈꽃이 핀 숲길은 서정적이고 동화적이다. 내 안에서 온갖 악다구니를 쓰던 것들은 다 어디로 빠져나간 것일까.
진달래대피소에 도착한다. 나무마다 핀 저 눈꽃이 져야 진달래와 철쭉이 피리라. 꽃은 짐으로써 다시 꽃을 피운다. 지지 않는 꽃은 가식이다. 가식이 생겨나기 무섭게 나무들은 서둘러 꽃을 버린다.
해발고도 1,500m를 넘어선다. 본격적인 구상나무 숲이 펼쳐진다. 흰 숲 사이로 아침햇살이 스며든다. 푸른 하늘을 만지는 나무들의 손끝에 흰 구름이 묻어 있다.
공간이 툭 트인다. 검은 바위로 울을 친 정상부가 보인다. 앞서 가던 이들의 탄성이 들린다. 무얼까. 뒤를 돌아본다. 망망한 운해다. 고사목 지대를 통과한다. 꼿꼿한 것에서부터 옆으로 쓰러진 구상나무들이 혼재하고 있다. 1980~1990년대와 비교해 보면 거의 멸절상태에 가깝다. 무엇이 이토록 세계적인 이 구상나무 숲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일까.
더러 관목만이 있는 고지대에 올라선다. 드넓게 펼쳐진 산록 아래로 오름들이 보인다. 오름은 바람의 표현이며 한라산의 피붙이고 식솔이다. 시간이 오르내리는 언덕이요 길이다. 제주도의 진면목은 바람에 있다. 바람은 제주의 표정이자 언어다. 토박이들은 바람으로 말하고 바람으로 표정을 짓는다. 육지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이유다.
1 만개한 설화가 매화꽃이다. 매화꽃으로 핀 그대 얼굴이 새봄이다. 2 하늘도 땅도 서로 사랑이어서 하트 모양의 백록담 분화구가 매화꽃이다. |
왕관봉과 삼각봉의 아우라, 바람이 길을 묻는 관음사
정상(해발 1,950m)에 선다. 명승 제90호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백록담 분화구에 흰 눈이 곱다. 봉오리를 연 거대한 매화꽃이다. 천지사방으로 열린 바람의 집이다. ‘순수’라는 것조차 사라진 무광의 빛을 뿜는 공(空)의 세계다. 마르지 않는 사유가 깊다. 전망은 드높고, 시야는 막힘이 없다. 날씨까지 포근해 산정에 앉아 봄맞이를 하는 시간이 길다.
관음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구름 아래로 사라오름의 분화구가 보인다. 이내 서벽 쪽 백록담을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선다. 건너편 능선 아래 산자락은 색깔이 다르다. 흰 눈을 녹인 녹두색이다. 따스한 햇살에 아지랑이 같은 봄기운이 피고 있다. 내려가는 길 모처럼 드넓게 펼쳐진 구상나무 수림이 보인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오후로 접어든 햇살 속에서 사슴의 뿔 같은 나뭇가지들은 순백으로 빛난다.
옛 용진각대피소 터에서 걸음을 멈춘다. 2007년 태풍 ‘나리’로 인한 폭우로 유실되었다는 안내문이 있다. 설명처럼 한라산 정상인 북벽과 삼각봉, 왕관릉으로 둘러싸인 경관이 장관이다. 주변 나무들의 설화는 눈꽃이라기보다는 수많은 매화꽃이다. 또한 피어나는 옅은 구름으로 인한 몽유도원 같은 비현실적인 골짝의 풍경들은 신비하고 몽환적이다. 산허리를 돌아서자 ‘용진각현수교’가 내려다보인다. 저 눈부신 꽃의 세계를 어디서 보았더라. 어느 매화마을 풍경이 저렇던가. 저만치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대 얼굴이 가장 먼저 핀 봄꽃이다. 다리를 건너다 뒤를 돌아본다. 하늘이 내려준 왕관이 보인다. 신분에 관계없이 왕과 왕비가 되는 시간을 누린다. 우리 모두의 명예를 한순간에 회복시켜 주는 숭고한 왕관봉의 덕이다.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한다. 2015년 5월 낙석으로 길이 막혔다가 2016년 10월 1일 재개방이 될 때까지 통제되었던 구간을 지나온 것이다. 삼각봉 일대는 구름이 짙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바람이 구름을 밀어낸다. 서서히 드러나는 삼각봉의 위용, 압권이다. 남미의 고봉이 저럴까. 울릉도 송곳산이 저렇던가. 봉우리에 해무리가 나타난다. 설화에 내리꽂히는 여과된 광선으로 푸르스름한 영기가 감돈다. 모름지기 한라산 정상부와 왕관봉으로 이어진 원경과의 환상적 조화는 관음사 코스의 백미다. 감동은 너울로 이어지고, 마음에 얻은 기쁨은 어깨 위의 무게를 소멸시켜 버린다.
개미등을 타고 산을 내려간다. 되를 닮은 정방형의 나무토막에 눈이 수북하다. 산은 누구에게도 되질하지 않는다. 우리가 겸허하기만 하면, 소복하게 덕을 베풀 뿐이다. 솔밭을 거쳐 탐라계곡 목교를 건넌다. 굴거리나무들이 봄을 예감하며 오므렸던 잎을 열어 기지개를 펴고 있다. 구린굴을 지나 탐방로를 나선 끝자락에 관음사가 있다.
사찰로 들어서는 입구 삼나무 숲길이 바람을 인도하는 회랑이다. 한 점 바람이 되어 천왕문을 들어선다. 해월굴의 촛불이 미동도 없이 어둠을 사르고 있다. 1948년 제주 4·3사태 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일까. 관음사도 이때 불탔다가 다시 세워졌다. 경내에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51호인 왕벚나무가 있다. 꽃의 개화가 저 나무의 오도송일 것이다.
황금빛미륵대불 앞에서 바람의 길을 묻는다. 석가모니불 열반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출현하는 미륵불의 용화세계는 어떤 세상인가. 내가 닦아야 할 지혜와 계행은 무엇인가. 서원하기보다 먼저 나의 계율 하나 세우는 것이 필요한 일이 아닐까. 나는 나의 자생지다. 나를 나답게 지켜가는 것, 그것은 남을 흉내 내지 않는 데 있다. 흉내는 거짓투성일 뿐이다. 꾸밈없는 그대로의 가슴, 그 얼마나 시원할까. 그게 바람일 것이다. 바람의 길일 것이다.
정상(해발 1,950m)에 선다. 명승 제90호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백록담 분화구에 흰 눈이 곱다. 봉오리를 연 거대한 매화꽃이다. 천지사방으로 열린 바람의 집이다. ‘순수’라는 것조차 사라진 무광의 빛을 뿜는 공(空)의 세계다. 마르지 않는 사유가 깊다. 전망은 드높고, 시야는 막힘이 없다. 날씨까지 포근해 산정에 앉아 봄맞이를 하는 시간이 길다.
관음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구름 아래로 사라오름의 분화구가 보인다. 이내 서벽 쪽 백록담을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선다. 건너편 능선 아래 산자락은 색깔이 다르다. 흰 눈을 녹인 녹두색이다. 따스한 햇살에 아지랑이 같은 봄기운이 피고 있다. 내려가는 길 모처럼 드넓게 펼쳐진 구상나무 수림이 보인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오후로 접어든 햇살 속에서 사슴의 뿔 같은 나뭇가지들은 순백으로 빛난다.
옛 용진각대피소 터에서 걸음을 멈춘다. 2007년 태풍 ‘나리’로 인한 폭우로 유실되었다는 안내문이 있다. 설명처럼 한라산 정상인 북벽과 삼각봉, 왕관릉으로 둘러싸인 경관이 장관이다. 주변 나무들의 설화는 눈꽃이라기보다는 수많은 매화꽃이다. 또한 피어나는 옅은 구름으로 인한 몽유도원 같은 비현실적인 골짝의 풍경들은 신비하고 몽환적이다. 산허리를 돌아서자 ‘용진각현수교’가 내려다보인다. 저 눈부신 꽃의 세계를 어디서 보았더라. 어느 매화마을 풍경이 저렇던가. 저만치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대 얼굴이 가장 먼저 핀 봄꽃이다. 다리를 건너다 뒤를 돌아본다. 하늘이 내려준 왕관이 보인다. 신분에 관계없이 왕과 왕비가 되는 시간을 누린다. 우리 모두의 명예를 한순간에 회복시켜 주는 숭고한 왕관봉의 덕이다.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한다. 2015년 5월 낙석으로 길이 막혔다가 2016년 10월 1일 재개방이 될 때까지 통제되었던 구간을 지나온 것이다. 삼각봉 일대는 구름이 짙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바람이 구름을 밀어낸다. 서서히 드러나는 삼각봉의 위용, 압권이다. 남미의 고봉이 저럴까. 울릉도 송곳산이 저렇던가. 봉우리에 해무리가 나타난다. 설화에 내리꽂히는 여과된 광선으로 푸르스름한 영기가 감돈다. 모름지기 한라산 정상부와 왕관봉으로 이어진 원경과의 환상적 조화는 관음사 코스의 백미다. 감동은 너울로 이어지고, 마음에 얻은 기쁨은 어깨 위의 무게를 소멸시켜 버린다.
개미등을 타고 산을 내려간다. 되를 닮은 정방형의 나무토막에 눈이 수북하다. 산은 누구에게도 되질하지 않는다. 우리가 겸허하기만 하면, 소복하게 덕을 베풀 뿐이다. 솔밭을 거쳐 탐라계곡 목교를 건넌다. 굴거리나무들이 봄을 예감하며 오므렸던 잎을 열어 기지개를 펴고 있다. 구린굴을 지나 탐방로를 나선 끝자락에 관음사가 있다.
사찰로 들어서는 입구 삼나무 숲길이 바람을 인도하는 회랑이다. 한 점 바람이 되어 천왕문을 들어선다. 해월굴의 촛불이 미동도 없이 어둠을 사르고 있다. 1948년 제주 4·3사태 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일까. 관음사도 이때 불탔다가 다시 세워졌다. 경내에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51호인 왕벚나무가 있다. 꽃의 개화가 저 나무의 오도송일 것이다.
황금빛미륵대불 앞에서 바람의 길을 묻는다. 석가모니불 열반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출현하는 미륵불의 용화세계는 어떤 세상인가. 내가 닦아야 할 지혜와 계행은 무엇인가. 서원하기보다 먼저 나의 계율 하나 세우는 것이 필요한 일이 아닐까. 나는 나의 자생지다. 나를 나답게 지켜가는 것, 그것은 남을 흉내 내지 않는 데 있다. 흉내는 거짓투성일 뿐이다. 꾸밈없는 그대로의 가슴, 그 얼마나 시원할까. 그게 바람일 것이다. 바람의 길일 것이다.
1 나무와 나무들이 어울려 뿜어내는 빛의 소묘가 거장의 명작이다. 2 관음사의 고요는 맑고 깊어 수심 없는 바다요 끝 간 데 없는 하늘이다. |
명승 영실기암과 오백나한, 서벽과 남벽의 위용
이튿날 아침 영실에 도착한다. 해발고도 1,280m다. 솔밭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오른다. 쉼터에 닿으면서 영실기암 및 오백나한과 마주친다. 명승 제84호다. 어느 바위도 서로 닮은 것이 없다. 기묘한 바위 군상들이 우뚝우뚝 치솟아 있다. 이어 병풍바위가 가깝게 조망되는 전망대에 선다. 신들의 거처라 불리는 거대한 수직 암벽들이 병풍을 둘러쳤다. 잔설처럼 눈만 일부 남고, 그 아래로 푸릇푸릇한 생명의 기운이 감돈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면서 아래와는 딴 세상인 눈의 나라다. 오름의 제국이다. 불레오름, 삼형제오름을 비롯한 오름들이 펼쳐져 있다. 우리의 삶이 저런 오름의 연속이 아닐까.
오를수록 바람이 세차고, 구름이 짙다. 윗세오름으로 가는 평탄한 숲길로 들어선다. 돌무더기 밀집한 개활지의 숲에 눈꽃이 만산이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의 미소가 빛이다. 숲을 빠져나와 명승 제91호인 선작지왓을 걷는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뿐만이 아니라 한라산 전체를 조릿대가 점령해 가고 있다. 진달래와 철쭉 핀 천상의 화원을 다시 보고 싶다.
윗세오름에서 구름이 걷히길 기다리다 남벽 분기점을 향해 걷는다. 이곳 구상나무 숲은 성판악 탐방로의 숲보다 훨씬 상태가 좋다. 이국적인 설경 속을 걸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맨발로 빙하기를 건너던 구상나무들을 생각한다. 숲속 산짐승의 발자국이 보이더니 노루 한 마리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나는 이방인, 너는 한라산의 주인. 산머루 같은 짙은 눈망울 속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평화가 깃들어 있다.
이튿날 아침 영실에 도착한다. 해발고도 1,280m다. 솔밭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오른다. 쉼터에 닿으면서 영실기암 및 오백나한과 마주친다. 명승 제84호다. 어느 바위도 서로 닮은 것이 없다. 기묘한 바위 군상들이 우뚝우뚝 치솟아 있다. 이어 병풍바위가 가깝게 조망되는 전망대에 선다. 신들의 거처라 불리는 거대한 수직 암벽들이 병풍을 둘러쳤다. 잔설처럼 눈만 일부 남고, 그 아래로 푸릇푸릇한 생명의 기운이 감돈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면서 아래와는 딴 세상인 눈의 나라다. 오름의 제국이다. 불레오름, 삼형제오름을 비롯한 오름들이 펼쳐져 있다. 우리의 삶이 저런 오름의 연속이 아닐까.
오를수록 바람이 세차고, 구름이 짙다. 윗세오름으로 가는 평탄한 숲길로 들어선다. 돌무더기 밀집한 개활지의 숲에 눈꽃이 만산이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의 미소가 빛이다. 숲을 빠져나와 명승 제91호인 선작지왓을 걷는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뿐만이 아니라 한라산 전체를 조릿대가 점령해 가고 있다. 진달래와 철쭉 핀 천상의 화원을 다시 보고 싶다.
윗세오름에서 구름이 걷히길 기다리다 남벽 분기점을 향해 걷는다. 이곳 구상나무 숲은 성판악 탐방로의 숲보다 훨씬 상태가 좋다. 이국적인 설경 속을 걸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맨발로 빙하기를 건너던 구상나무들을 생각한다. 숲속 산짐승의 발자국이 보이더니 노루 한 마리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나는 이방인, 너는 한라산의 주인. 산머루 같은 짙은 눈망울 속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평화가 깃들어 있다.
1 제주 어디서나 맨 먼저 환한 목소리로 봄을 알리는 유채꽃이 나를 부른다. 2 베일을 벗고 신비를 드러낸 백록담 화구벽 앞에서 모든 가식을 벗는다. |
구름 덮인 백록담 서쪽 화구벽 가까이 닿는다. 베일을 벗는 시간, 인내를 요구한다. 기다림이 푸른 하늘로 바뀐다. 잠깐이지만 그 아래로 드러나는 신비의 실체는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함이요 장엄함이다. 남벽 쪽으로 이동한다. 오른쪽 건너편 숲도 독특한 풍경이다. 구상나무와 사스레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빛의 소묘가 한 폭의 그림이다. 오가는 구름 속에서 모습을 바꿔 나타나는 백록담 화구벽에 초점을 맞춘다. 가운데 계곡을 중심으로 높이 200m가량의 화구벽이 만화경처럼 좌우로 열린다. 만물상으로 나타나는 웅장한 화면은 최고의 명풍경이 아닐 수 없다.
뛰어난 아름다움은 우리를 감동시켜 진실되게 만든다.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 인간의 본성이란 본디 자연의 본성일 것이다. 이렇게 사물과 자연의 정서와 감정을 가슴에 새기는 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존재와의 소통 방식이다. 자연-세계-나-사물로 연결되는 순환적 생명의 고리가 상호 간의 유기적 관계로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열린 영적 대화의 한 방식이다.
작은 언덕을 넘는다. 돈내코로 흘러내린 광활한 산록이 펼쳐진다. 과거 테우리들이 마소를 방목하던 방목지다. 푸른 하늘이었다가, 구름이었다가 풍경은 시시각각 바뀌며 또 다른 고원의 세계를 보여 주는 동안 겨울은 봄으로 변주된다. 다시 한 번 면사포를 벗고 모습을 드러내는 남벽은 풍경의 정점이자 절창이다. 신부였던 설문대할망의 모습이 저러했을까.
방아오름샘에서 목을 축인다. 평궤대피소가 보인다. 때마침 남벽이 개방된다는 소식이다. 또 그때를 기다려보자. 산 아래로 눈을 돌리면 서귀포가 한눈에 조망된다. 구분하기 어렵지만 섶섬, 문섬, 범섬 등 일품의 섬들이 보여 주는 제주의 풍경은 다채롭고 이색적이다.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는 산방산의 이마가 석양에 물들고 있다. |
바람의 말, 구름의 말, 나무의 말
이제 산을 내려가야 한다. 어디로 갈까. 어디든 내가 내려가는 세상은 백록담 화구벽을 본 시점을 경계로 분명 조금은 다를 것이다. 구상나무들의 긴 행렬과 마주친다. 나는 왜 이 행렬에서 ‘눈물의 여로’가 떠올려지는 것일까. 책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문장들이 줄지어 간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조그만 남자 아이가, 남편이 죽은 아내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무너진 정의와 신뢰를 모두가 다시 일으키려는 새봄이 오고 있다. 이쯤에서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그치기를 바란다. 구상나무들이 더 이상 그들의 영토를 빼앗기고, 이 산에서 쫓겨나지 않길 진정으로 바란다. 사람이 여전히 절망에서 이 세상 희망을 꽃피우는 꽃씨이길 바란다. 바람이 바람을 버릴 때 진정한 바람이 되는 한라의 바람처럼.
이제 산을 내려가야 한다. 어디로 갈까. 어디든 내가 내려가는 세상은 백록담 화구벽을 본 시점을 경계로 분명 조금은 다를 것이다. 구상나무들의 긴 행렬과 마주친다. 나는 왜 이 행렬에서 ‘눈물의 여로’가 떠올려지는 것일까. 책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문장들이 줄지어 간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조그만 남자 아이가, 남편이 죽은 아내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무너진 정의와 신뢰를 모두가 다시 일으키려는 새봄이 오고 있다. 이쯤에서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그치기를 바란다. 구상나무들이 더 이상 그들의 영토를 빼앗기고, 이 산에서 쫓겨나지 않길 진정으로 바란다. 사람이 여전히 절망에서 이 세상 희망을 꽃피우는 꽃씨이길 바란다. 바람이 바람을 버릴 때 진정한 바람이 되는 한라의 바람처럼.
‘꽃망울 노랗게 터지고 조밀한 잎 파릇이 피어나면 고운 바탕은 황금이 어리네…’ 수선화를 노래한 추사 선생의 시다. |
눈꽃 매화꽃
주름 없는 꽃은 없네
오늘 저렇게 꽃피기 위해
뭉친 주름, 꽃봉오리였네
백록담을 내려와 왕관봉 아래
설화 속 출렁다리 건너다
한꺼번에 부풀어 터졌네
하늘로 땅으로 활짝 열려서
미소마다 꽃잎이네
꽃잎마다 바람이고 바람마다 향기네
수천수만 눈꽃송이들
용진각골짝의 매화 눈보라로
휘휘 휘몰아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