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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
금강산 일대는 산과 바다를 동시에 끼고 있어 인간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고성군 염성리 강가를 비롯하여 삼일포, 남강 하류 등지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반달칼 등이 이같은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선사시대가 끝나고 고대에 이르러 이 지역에는 예(濊) 또는 맥(貊)이라 불리는 여러 소국(小國)이 형성된 바,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
삼국시대 |
부족국가 시대가 끝나며 고대국가로 바뀌어 갈 무렵, 예와 맥은 고구려에 흡수 되었다. 5세기 초,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신라 왕자 복호가 박제상과 함께 귀국할 때 고성포(현재의 고성군 남강 어구)를 통해 돌아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의 유적으로 고구려의 전통적인 축성 방법을 사용한 온정리성이 있다. | |
통일신라 |
백제에 이어 고구려가 멸망하자 금강산 일대는 신라의 땅이 된다. 신라의 진덕여왕은 국사를 결정하는 신령스런 장소를 이곳에 두었는가 하면, 많은 화랑들이 총석정, 삼일포 등의 명소를 찾아 심신수련을 했다고도 한다. 8세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선종(禪宗)이 수입되면서, 금강산에도 표훈사, 장안사 등의 사찰이 생겨나게 되고, 9세기 말에는 명문장가 최치원이 금강산을 찾아 구룡폭포를 보곤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이는 금강산을 노래한 한시(漢詩)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지금도 구룡연 너럭바위에는 그의 작품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말, 경순왕의 아들인 태자는 고려에의 복속을 반대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베로 옷을 만들어 입고, 풀뿌리로 연명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비로봉에서 외금강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비탈진 언덕에 마의태자묘가 남아 있다. | |
고려시대 |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더욱 융성해져 금강산에만도 1백여 개가 넘는 사찰이 들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인근의 주민들은 피해가 막심했는데, 그 까닭은 절에서 치르는 모든 의식과 행사에 드는 음식과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11세기에 이르러 여진을 비롯한 왜구, 몽고족 등의 침략으로 금강산 지역의 주민들은 또다른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원산, 고성 등지에는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케 했다. 그러나 외적의 침략이 끊이지 않자 주민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신체를 단련하고 무예를 익혔다. 후일 임진왜란 때 사명당을 비롯한 승군(僧軍)이 조직된 것도 이같은 바탕이 있은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금강산은 민족의 산으로 숭상받아 이곳을 찾는 공경대부와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이 시기에 지어진 예술 작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안축의 '관동별곡'과 이곡의 '동유기'이다. | |
조선시대 |
조선 시대에 이르자 금강산은 멀리 중국을 비롯하여 일본, 인도에까지 명산으로 소문이 나서, 외국 사신들은 금강산 구경하기를 소망했다. 또한 금강산은 지리 및 행정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 되어 수많은 성과 봉화대가 세워졌으며, 통신과 지방 통치에 필요한 역참 체계도 정비되었다. 금강산 관련 예술 작품 또한 풍성했는데, 남효온의 '유금강산기', 성현의 '동행기', 정곤수의 '금강록', 법종의 '유금강록', 이상수의 '동행상수기' 등이 있으며 이이는 '풍악행'을 비롯하여 '만폭동' 등 10여 편의 기행시를 남겼으며, 퇴계 이황은 5언 32구의 장편시를 지었다. 금강산을 그린 그림 또한 적지 않은데 지금은 비록 남아 있지 않으나 배련의 '금강산도', 이경연의 '금강산도', 이정의 '산수도' 등이 유명하고, '만폭동' '혈망봉', '구룡폭' 등 금강산 곳곳을 화폭에 담은 정선의 작품은 상당수가 전한다. | |
일제시대 |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금강산 역시 갖은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광석의 채굴과 목재의 수급을 위해 금강산을 무분별하게 훼손했으며, 일본의 자본가들은 온정리 일대에 수많은 요릿집과 여관을 지어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했다.이같은 수모를 받으면서도 민족의 정기를 잃지 않으려는 우리 지식인들의 노력은 끊이질 않았다. 밀려드는 서구문명에 힘입어 신문과 잡지 등이 창간되며 금강산은 이들의 지면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육당 최남선의 '금강예찬', 역사학자 문일평의 '동해유기' 그리고 소설가 정비석의 '산정무한' 등이 당시에 쓰여진 작품이다. | |
해방 이후 |
6. 25 전쟁으로 금강산은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고, 북한은 1980년에 금강산을 본격 관광지로 개발하고, 1987년에는 일본인 관광객을 모집했다. 이때 북한은 비행장, 골프장, 수영장, 스키장, 케이블카 등의 시설을 갖추는 금강산 종합 개발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실현된 것은 없다. 1998년 금강산은 반세기가 넘는 53년만에 우리에게 그 자태를 드러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데다가, 유람선을 타고 가야만 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선조들이 다니던 옛길을 다시 밟으며 금강산을 오를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