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西安)에서 두 번째 만난 인물은 중국의 4대 미인이자 최고의 요부,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일컬어지는 양귀비이다.
시황제가 전국을 통일한 이래 천 년쯤 지난 후 시안은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이 되었는데 6대 황제 현종은 자신의
며느리였던 절세미인 양옥환(楊玉環)을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후궁 귀비(貴妃)로 삼은 후 그녀를 향한 총애가 남달랐다.
- ▲시안 화청지(華淸池)에 세워진 양귀비 동상, 통통하다던 얘기와는 달리 칠등신 서양식 미녀를 세워 놓았다.
그동안 칭송을 받으며 잘 해오던 정치를 멀리하고 여색에 빠진 채 그녀의 혈육과 양아들 등에게 지나친 권세가 집중되니 나라는 도탄에 빠지고 서로 간의 권력다툼으로 한쪽이 군사반란을 일으키니 황제와 함께 몽진 중에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은 목을 매 죽고만 여인이다.
양옥환(楊玉環)
719년 당 현종(685~762) 집권 초기, 쓰촨 성에서 태어났으며 하급관리를 지내던 부친 슬하에 아들 없이 세 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부친은 일찍 죽어 숙부 집에서 자라면서 나름대로 교육도 잘 받았으며 특히 기생 출신 하녀에게서 가무도 배웠다고 한다. 양옥환은 친척 양신명의 집 연회에 자주 초대되었는데 그 연회에서 황실 일족들과 친하게 되었으며 그러던 중 현종의 제18황자 李瑁(이모)와 혼인하게 되어 현종의 며느리가 되었다.
당(唐) 현종(玄宗)
양옥환의 시아버지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은 원래 3남으로 적장자가 아니어서 황태자가 되거나 황제에 오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현종의 할아버지인 3대 황제 고종과 할머니인 측천무후 이후 나약한 황제들의 즉위와 폐위, 복위와 살해가 반복되는 등 혼란한 정국을 해결한 공로로 큰 형의 양보를 받아 황태자가 되었다가 6대 황제로 즉위한 사람이다.
즉, 현종에게는 할머니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사실은 그 이전에 증조할아버지인 2대 황제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황태자와 눈이 맞았고 그 황태자가 황제(고종)로 즉위하자 후궁이 되었다가 황후와 다른 비빈들을 모두 처치하고 황후가 된 여인이다. 즉 아버지(태종)의 후궁에서 아들(고종)의 후궁이 되었다가 황후까지 되어 훗날 근친상간의 시비에 말려들게 된 사연이다.
이렇게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남편 고종이 병약해지자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자기 아들을 중종으로 즉위시켰다가 폐위시킨 후 다른 아들을 예종으로 즉위시켰지만 역시 폐위시킨 후 마침내는 스스로가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다가 모반을 일으킨 대신들과 장군들의 강요로 다시 중종을 복위시킨 후 물러났다가 측천무후는 사망하였지만, 이번에는 중종의 황후 위 씨가 제2의 여황제(女皇帝)를 꿈꾸면서 무능한 남편 중종(현종의 큰아버지)을 독살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자 현종이 군사를 일으켜 큰어머니인 위 황후 일파와 아직도 남아서 권세를 부리던 할머니 측천무후 일파를 모두 소탕하고 물러나 있던 아버지 예종을 다시 복위시킨다. 그러자 큰형이 태자 자리를 현종에게 양보하였으며 2년 후 예종이 사망하자 현종이 즉위하여 당나라의 6대 황제가 된 것이다.
개원의 치(開元의 治)
황제에 오른 현종은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유능한 관리들을 등용하여 민생 위주의 정치를 베풀었다. 당 태종 이세민이 이룩했던 태평성대에 버금가는 치세로 후세사람들은 당시의 연호를 따서 '개원의 치(開元의 治)'라고 불렀으니 현종은 당나라의 번영과 강성함을 이끌었으나 이후 절세미인, 천하의 요부 양귀비를 만나 몰락과 쇠퇴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양옥환(楊玉環)과의 만남
태평성대와 훌륭한 치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자 현종은 이내 거만하게 된다. 특히 유능한 관리들을 적재적소에 쓰던 그가 어느 때부터인가 아첨과 아부에 귀를 기울이고 직언을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아첨꾼 승상 이임보는 무려 19년간이나 현종을 따돌리고 정치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지만, 현종은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보고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총애하는 무혜비(사후 황후로 추존)가 사망하고 현종은 실의에 빠져 무기력하게 되자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이를 눈치채고 현종과 양옥환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는데, 양옥환 부부가 화청지 온천으로 나들이 간다는 것을 알게 된 환관 고력사는 현종을 화청지로 보내 양옥환을 만나게 한다.
현종은 양옥환의 출중한 미모에 반하고 춤과 노래에 흠뻑 빠져 양옥환이 며느리임에도 마음에 들어 하며 이를 어쩌면 좋을지 환관 고력사에게 속을 털어놓는다. 황제의 마음을 알게 된 고력사는 다시 양옥환을 만나 넌지시 그 속을 떠보게 되는데 태자도 아닌 먼 황자의 아내보다는 황제의 애첩을 택하기로 하였는지 이날 이후 양옥환은 현종의 후궁이 된다.
도교(道敎)로의 입문
그러나 세상에는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며 민심이 살아 있는 법, 아무리 황제라 해도 며느리를 바로 후궁으로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측천무후의 경우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아들 고종의 후궁이 되어 근친상간의 시비가 붙은 것을 알지 않는가? 이럴 때는 또 영악한 간신배들이 실력을 발휘하는 법, 그들은 양옥환을 바로 황궁으로 데려오지 못하고 도교의 사원으로 출가시켜 먼저 남편과 떼어 놓은 후 궁궐에 도교 사원을 지어 양옥환을 이곳의 여관(女冠)으로 불러들이는 수순을 밟는다.
당시 도교에 입문하면 그 이전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은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데 아마도 이를 노려 며느리의 신분 탈색을 위한 과정이 아니었던가 싶다. 일설에 현종은 충(忠)과 효(孝)를 강조하면서 '나라를 위하여는 충성을 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니 좋은 것은 부모에게 바쳐야 하지 않느냐?'는 시(詩)를 지어 아들에게 좋은 것(양옥환)은 아버지 현종에게 바치라는 암시도 했다고 한다.
양옥환, 귀비(貴妃)가 되다
이렇게 양옥환과 현종이 만났을 때가 각각 22세, 57세였다. 이후 현종은 양귀비의 품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되어 양옥환의 자매들도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하고 사촌오빠 양소에게는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그는 간신 이임보나 환관 고력지와 결탁하여 숱한 관직을 독점하고 세도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게 한구석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는 61세의 현종은 27세의 양옥환을 귀비에 봉하게 되는데 이때 황후가 공석이었으므로 양귀비는 사실상 황후의 자리에 앉은 기쁨을 누리게 되며 어느새 그의 사촌오빠 양국충은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라 양귀비 세력이 대당(大唐)제국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양귀비를 내친 현종, 다시 화해하다
양귀비에게는 세 언니가 있었는데 모두 국부인이라는 높은 지위를 하사받았다. 그런데 그중 셋째 언니 괵국부인 양옥쟁의 미모 또한 뛰어나서 현종이 입궁시키라고 하자 양귀비는 질투심으로 이를 거절하고 언니의 입궁을 방해하다가 결국 내침을 당하게 된다. 궁에서 내쳐진 양귀비는 양국충의 집에 머물었으며, 사촌오빠 양국충과 환관 고력사가 머리를 맞대고 양귀비의 환궁을 모의하여 현종과 양귀비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화청지에서 다시 만나게 하니 두 사람은 함께 목욕하면서 결국 화해하여 환궁하였다고 한다.
- ▲온천인 화청지(華淸池)에 남아있는 귀비지(貴妃池), 현종이 하사한 양귀비 목욕탕이다.
- ▲황제 목욕탕인 연화 탕(蓮華湯), 황제와 妃는 따로 목욕하는 것이 원칙인 듯하다.
- ▲씻기를 마친 양귀비가 올라 현종을 기다리며 지긋이 내려다보던 누각이라고 한다.
이렇게 현종은 양귀비의 치마폭에 싸여 정사를 멀리하고 조정은 양귀비와 양국충 일가의 전횡이 극에 달하였으며 환관 고력사와 함께 환관 정치, 외척정치로 나라를 좌지우지할 때, 변방의 절도사로 당시 군사의 1/3 이상을 장악하고 있던 안녹산이 황궁에 들어와 현종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 이 자리에서 안녹산을 처음 본 양귀비는 당당한 그에게 호감을 느껴 자주 불렀고 친해지면서 마침내 안녹산을 양아들로 삼게 되니 십 년 이상 나이 먹은 건장한 무장(武將)이 아들이라며 귀비의 처소를 수시로 들락거리게 되었다.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은 당시 조정 권력을 모두 손에 쥐고 있었으나 변방의 절도사로 군사력을 가진 안녹산이 나타나 양귀비와 친밀해지자 그를 잘라내려고 수차례 모함하고 고변하였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막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권력은 양국충에게서 요지부동으로 떠나지 않자 안녹산은 부하 사사명과 함께 '간신 양국충을 토벌하자'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고 하니 바로 안사의 난(安史之亂)이다.
이후 안녹산은 그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고 안경서는 사사명이 죽인다. 그러나 사사명도 아들 사사의에게 살해당한 후 사사의 마저 자결함으로써 9년간 끌어왔던 안사의 난은 마무리되었지만 그 과장에서 당나라는 급격히 쇠약해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장안(長安)을 버린 몽진 길에서 양귀비(楊貴妃) 자결하다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의 군대가 수도 장안으로 다가오자 양국충이 현종에게 몽진(피난)을 건의하여 쓰촨 성으로 떠나게 되는데 일설에는 백성들 몰래 도망가듯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를 호위하고 피난을 떠나던 군사들 간에 이 모든 환난은 양국충과 양귀비가 원흉이라며 이 둘을 처치하고 나서야 가겠다는 모반이 일어나고 환관 고력지와 대신들도 이에 동조하니 현종도 어쩔 수 없이 양국충은 끌어내려져 죽임을 당하였으며 군사들은 양귀비도 내어놓으라고 하지만 현종은 몇 번이나 이를 변명하며 살리려고 하였다.
그래도 군인들은 수용하지 않고 소요는 진정되지 않았으며 환관 고력지도 역부족이라고 진언하자 마침내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하여 근처 나무에 목을 매 죽으니 마침내 천하의 요부 양귀비가 죽었다고 병사들은 만세를 부르며 그제야 몽진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반란을 맞아 수도 장안을 버리고 몽진을 떠난 현종은 피난길에 양국충과 양귀비를 버려 죽게 하였으며, 마침내는 대신들의 재촉으로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다가 장안으로 돌아와서도 쓸쓸한 나날은 보내다가 78세에 승하하였다.
양귀비와 당 현종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
당 현종이 죽은 지 50년이 지나 그들의 사랑을 주제로 장편 서사시를 지었으니 바로 장한가(長恨歌)이다. 둘이 만나 사랑하고 귀비가 되어 총애를 받고 지내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과정과 그 후 황제 현종의 쓸쓸한 나날들을 그리고 있으며 현종이 사후에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는 이야기를 120구 840자의 서사시로 지은 것이다.
둘의 사랑 이야기를 애절하게 그렸는데 특히 마지막 구절을 보면 [上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주소서/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언약했지요] 라고 하면서 사랑을 잘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화청지의 장생전(長生殿).
양귀비를 만나고 나서
140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한 양귀비. 꽃다운 22세에 시아버지 현종을 만나 남편을 버리고(?) 그의 후궁이 된 후 27세에는 귀비가 되어 황후 못지않은 권세를 부리다가 38세의 나이에 피난길에서 나라를 망친 원흉으로 지목되어 목을 매 자결해야 했던 양귀비. 훗날 사람들은 그녀를 일컬어 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해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무엇을 손에 쥐고 어떻게 살고 싶었을까?
중국의 3대 미녀, 4대 미녀를 논할 때 대부분이 하늘거리는 몸매로 묘사하지만, 양귀비만큼은 살이 통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쳇말로 쭉쭉은 아니고 살집이 적당히 오른 빵빵 스타일이 아니었나 싶다. 심지어 키 155cm에 몸무게 65kg의 건강한 체형이었다고 근거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튼 자타가 공인하는 건강미녀 양귀비는 화려하게 불타올라 일국의 황제와 사랑을 나누고는 그의 눈물 속에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의 대표적 사례인가.
- ▲당나라 시대의 여인상, 시안박물관에 전시된 인형을 보더라도 대부분 통통한 몸집임을 알 수 있다.
진실한 삶에 대한 자세와 진심 어린 사랑에 대한 무한한 의심과 이해 못 할 스토리에 아무리 애를 써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종과 양귀비가 이렇게 된 것은 사실은 자기 친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를 황태자에 올리려고 현종 앞에 자주 보여주게 한 그의 생모 무혜비 탓이라고 하니 결국 그 아들 이모(李瑁)는 황태자에 오르지도 못하고 부인만 빼앗기고만 기구한 운명이 된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전남편은 멀리 전쟁터로 내보내거나 역모에 걸어서 죽게 하는 등 비참해진다는데 그 뒷이야기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일약 황후에 버금가는 신분상승에 성공한 듯 보이던 양귀비도 결국은 십 년 남짓한 세월 만에 피난길에 자살해서 죽어야 하는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의 교훈을 남겨주었으니 후세인들은 이를 눈여겨볼 일이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