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0.23 03:02
[오늘부터 개인전 여는 오원배]
화학 원리 따라 연구해 작업… 유학시절 본 파리 지붕 풍경도
"그림의 기본 말하려 양식 바꿔… 땀·시간 응축된 '노동'의 예술"
미대 가려고 고교 시절 화학 시간은 아예 빠지고 그림만 그렸던 한국 유학생은 프랑스 교수가 칠판에 적은 화학 공식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작가는 30년 전 자신을 '멘붕'에 빠지게 한 이 공식을 끈질기게 부여잡았다. 귀국한 뒤 세 차례 다시 파리로 가서 프레스코 기법을 연구했다. 2007년 개인전에서 프레스코화 4점을 살짝 선보였고, 2012년엔 강화도 전등사 무설전의 후불화(後佛畵)를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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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오원배는 종이에 적은 화학반응식을 내밀었다. 프레스코 기법에 깔린 원리였다. “요즘 예술은 즉흥적인 아이디어에만 의존하려 해요. 끊임없이 연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작가는 “그림의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오종찬 기자
이렇게 30여년간 체화(體化)한 '오원배식 프레스코화' 30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23일부터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시작하는 개인전 '순간의 영속: 그리기의 위대한 노역' 전에서다. 동국대 미대를 졸업한 오원배는 파리 유학 시절 파리 국립미술학교 회화 1등상을 받았고, 귀국 후 '이중섭 미술상'(1997)도 탄 중견 화가다.
그간 "실존에 대한 내 주제를 작은 그림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며 100호가 넘는 대형 화폭에 육체를 뒤틀며 고뇌하는 인간 군상을 그려왔던 그가 이번엔 프레스코로 양식을 과감히 바꿨다. 오원배에 따르면 프레스코화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계량화된 예술이다. "그냥 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고 프레스코화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수세기 동안의 경험에 따라 석회, 물, 모래를 섞는 비율이 수치화됐어요. 화학반응까지 철저히 파악해야 할 수 있는 작업이에요." 또한 '노동의 예술'이라 했다. 흙손으로 석회를 수없이 개고, 점성을 높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절구질한다. "절대 즉흥의 예술이 아닙니다. 땀과 시간이 응축된 예술이죠." 미장이, 화학자 같은 작가다. 작업실엔 흙손과 화학 용품이 뒹군다. 과학 실험실과 공사판이 섞인 풍경이다.
정통 프레스코화 기법을 따랐다. 석회, 물, 모래를 섞어 여러 겹 덧바르고 나서 밑그림을 그린 종이를 대고 윤곽선을 눌러 그린 다음 채색한다. 석회는 한 번 굳어버리면 수정할 수 없다. 작가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최대 20시간. 철저한 준비,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없으면 못 해내는 작업이다. 잠도 안 자고 20시간을 꼼짝없이 그림 앞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인고'의 그림이다. 그는 "감(感)과 아이디어에만 의존해 자극적인 작업만 하려는 우리 미술 풍토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했다.
과거 어둑어둑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감돌던 전시장이 이번엔 파스텔톤으로 변했다. 어두운 표정의 사람 대신 파리의 지붕과 굴뚝이 화면을 채웠다. 1982년 파리에 유학 갔을 때 처음 머물렀던 몽마르트르의 자취방 창밖으로 본 풍경이다. 어린 시절 고향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 봤던 중국 가옥들의 지붕이 중첩되며 이 풍경은 '가공되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젊음에 각인됐다.
독신을 고수하다 4년 전 늦장가를 간 그를 두고 지인들은 "장가가더니 세상이 밝게 보이는 것 같다"며 우스개를 던진다. "프레스코도, 파리 풍경도 30년을 묵힌 겁니다." 억울하단 사람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사랑의 힘이든, 고뇌의 흔적이든, 변화를 감행한 중견 화가의 용기는 찬사받을 만하다. 전시 다음 달 19일까지. (02)725-1020
☞프레스코화
수산화칼슘에 모래를 섞어 바른 뒤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해 완성하는 회화. 고대 벽화와 유럽의 성당 벽화 등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기법으로 14~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 체계화됐다. 조토, 마사초,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거장들이 즐겨 사용했다.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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