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의 행운과 出世
「周旋家」다운 정치감각으로 準사무라이도 못 되는 신분에서 幕末의 격랑을 뚫고 나와「維新 3傑」등 일류 인물들이 쓰러진 후 明治정부의 초대 수상으로 출세한 이토 히로부미. |
이토 히로부미는 이웃을 잘 만난 사람이다. 원래 히로부미는 최하급 사무라이인 아시가루(足輕: 졸병) 바로 아래 신분이었지만, 나이 17세 때 松下村塾의 숙생이 됨으로써 팔자를 고쳤다. 松下村塾과 그의 집은 불과 300m 거리다. 설사 그렇다할지라도 히로부미는 쇼인이 신분차별 없이 숙생을 받지 않았다면 학업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히로부미는 쇼인의 문하생이 됨으로써 「維新3傑 중의 1人」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막부 타도의 최고 영웅」 다키스기 신사쿠(高杉晉作)의 부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의 長處(장처)를 지적해 격려하는 교육방식을 구사했던 스승 쇼인으로부터는 『周旋家(주선가)가 될 것이다』라는 정도의 평가 밖에 받지 못했다. 후일 히로부미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周旋家를 「정치가」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현대적 의미는 「브로커」에 더 가깝다.
요시다 쇼인은 뛰어난 교육자였으나 숙생들을 편애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가 사랑한 제자는 구사카 겐즈이와 다카스기 신사쿠, 요시다 도시마로였다. 그들에 비해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토 公爵 자료관」(야마구치縣 熊毛郡 大和町 소재). 여기서 幕末로부터 明治시대를 살았던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를 각종 자료와 映像으로 소개하고 있다. |
그러나 다음해인 1864년 4개국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井上馨과 급히 귀국해, 「괴상한 英語」로 열국과 강화회담時 통역 등으로 나섰다. 1865년 다카스기 신사쿠의 功山寺 거병 때 이토는 부하 30명(力士隊 소속)을 이끌고 신사쿠를 도왔다.
明治維新(1868) 이후에는 효고(兵庫)縣知事, 工部大輔(차관)으로 출세했다. 특히 歐美 제국을 시찰하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사절단에 副使로 참여했고, 귀국 후에는 參議 겸 工部卿(장관)으로 急부상했다. 이후 최고의 改革實勢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사쓰마번 출신)를 도와 근대화 정책에 적극 협조했다.
하기市의 쇼인 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요시다 쇼인(가운데), 구사카 겐즈이(왼편), 다카스기 신사쿠(오른쪽) 師弟의 동상. |
1885년 12월, 이토는 초대 총리대신에 취임했고, 제4차 내각까지 조각하는가 하면, 明治憲法 제정을 주도했다.
1905년에는 조선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했고, 동년 12월에는 초대 朝鮮統監(조선통감)에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1909년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安重根 의사가 발사한 권총 세 발을 가슴에 맞고 절명했다. 청년 시절에 攘夷派였던 히로부미는 검술의 下手였음에도 불구하고 佐幕派 1人을 밤길에 급습해 베어 죽인 일이 있었다.
이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다카스기 신사쿠와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다카스기는 분방했고, 직감적으로 행동하는 사나이였으며 시인이었다. 오쿠보는 냉철했고 논리적이며 현실 정치가였다. 이토는 자신이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둘 중 어떤 유형을 택해야 할지를 놓고 평생 고민했다고 한다.
1863년 조슈번 청년 엘리트 5명이 英國에서 유학했다. 앞줄 맨 왼쪽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뒷줄 맨 오른쪽 이토 히로부미. |
그는 제국일본이 감행한 침략정책의 원흉이다. 총리대신 재임 시절에 英日동맹을 맺고 러日전쟁을 감행했다. 러日전쟁 직후인 1905년 미국 T.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와 가쓰라-태프트 密約을 맺었다. 이 密約에서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는 대신에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했다. 1910년의 韓日합방은 그의 제3차 내각총리 시절의 일이었다.
가쓰라는 조슈군벌의 제2인자였다. 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系이긴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접근했던 재주꾼이었다. 가쓰라의 옛집에서는 입장료를 받는 대신에 성금함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필자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한국인으로서 韓日합방 당시의 일본제국 총리대신의 현창사업에 성금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육군의 敎皇」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의 옛집에서 橋本川을 따라 1km쯤 올라가면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의 옛집이 있다. 야마가타는 「일본 육군의 敎皇(교황)」이라 불리었다. 그는 明治시대를 통틀어 일본제국의 軍과 정부에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조슈번의 나카마(中間: 足輕보다 하위 계급)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소년기에 槍術(창술)을 연마해 「창의 小造(소조: 아리토모의 舊名)」이라 불렸다. 松下村塾에서 배우고 쇼인의 「飛耳長目(비이장목: 정보수집꾼)」으로서 京都 정세를 살피면서 尊攘派 인물들과 안면을 넓혔다. 1863년에는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奇兵隊에 입대해 軍監(군감: 제2인자)이 되었다.
民兵조직인 奇兵隊와 조슈번의 정규군인 先鋒隊 사이에 벌어진 무력충돌에 책임을 지고 신사쿠가 奇兵隊 총독에서 물러난 후의 일이다. 신사쿠가 조슈번 막부의 압력에 굴복한 恭順派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궐기를 호소했지만, 야마가타는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낙담한 신사쿠는 후쿠오카로 망명해 한동안 잠복했음은 앞에서 썼다.
신사쿠가 후쿠오카로부터 시모노세키로 되돌아와 功山寺에서 불과 80명을 이끌고 거병할 때도 야마가타는 눈치를 살폈다. 이토 히로부미가 力士隊의 부하 30명을 이끌고 신사쿠의 진영에 가장 먼저 가담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신사쿠가 거병 후 연전연승을 하자 奇兵隊를 이끌고 신사쿠의 진영에 참여했다.
1866년의 四境전쟁(長州전쟁)의 小倉口전투에서는 신사쿠의 휘하에서 싸웠고, 막부군을 追討하는 戊辰(무진)전쟁 때(1868년)는 北越 방면에서 戰功을 세웠다.
야마가타의 부패, 이토의 好色
日本帝國의 한국 병합 당시의 총리대신이며 육군대장인 가쓰라 다로(桂太郞)의 옛집 앞에선 필자. |
1885년에는 내무대신으로서 관료인맥을 심어 두었고, 1887년에는 총리대신이 되어 제1차 내각, 1898년에는 제2차 내각을 조각했다. 1894년 淸日전쟁에서는 제1군 사령관, 1904~1905년의 러日전쟁에서는 군부의 제1인자로서 參劃(참획)했다. 그 후 정치의 표면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야마가타系의 가쓰라(桂太郞) 내각과 데라우치(寺內正毅) 내각을 성립시킴으로써 정계·군부에 절대적 행사를 계속했다.
야마가타는 淸日전쟁 당시 만주에서 현지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의 군사지식은 戊辰전쟁·西南전쟁 이후 조금도 발전되지 않았다. 직계인 가쓰라조차 그를 본국으로 불러오기 위해 소환공작을 했을 정도였다. 그 후 10년간이나 정쟁 속에서 지내 군인으로서의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벌어지기만 하면 元帥(원수)의 지위를 이용해 사사건건 개입했다.
조슈閥을 형성해 獨斷·獨走를 감행한 「帝國 육군의 敎皇」으로 군림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는 미쓰비시 재벌과 야합하는 등 부패했지만, 군부와 정부에 조슈 人脈을 심어 이토 히로부미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
조슈번은 막부 시대 이후 다른 번에 비해 公私 구분이 애매했다. 이른바 「幕末 志士」 활동 중 개인적으로 허비한 유흥비도 공금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明治維新의 또 다른 기둥인 사쓰마번은 금전에 관한 윤리관이 확립되어 있었다. 조슈의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처럼 공금을 질탕하게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가타의 옛집을 뒤로 하고 1.5km쯤 북상해 하기市 한복판에 위치한 明倫(명륜·메이린)소학교 앞에 내렸다. 이 학교 자리에 藩校인 明倫館이 있었다. 지금은 조슈번 당시의 「有備館」만 남아 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14세 무렵에 「에도 3大 道場」의 하나인 練兵館(연병관) 館主의 아들이 有備館에 찾아와 연습시합을 하면서 조슈 번사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憧憬(동경)해 검술에 정진한 끝에 柳生新陰流의 면허를 皆傳한 高手가 되었다.
明治 시기 高官大爵의 옛집들이 몰려 있는 성밑거리
조슈번의 藩校인 明倫館의 道場인 有備館. |
슈스케는 藩主 모리 다카치카의 주치의, 겐조는 藩세자 사다히로(定廣)의 주치의로 재직하다 후일 明治 天皇의 주치의가 되었다. 역시 의사인 겐조의 아들 슈조(周)는 야마가타 도모유키 내각과 마쓰카다(松方正義)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천연두에 걸려 죽거나 목숨을 건져도 곰보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예컨대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기 신사쿠도 홍역을 앓아 「살짝 곰보」였다. 신사쿠는 10세 때 천연두에 걸려 위독상태에 빠졌으나 옆집에 사는 「일본을 대표하는 名醫」 슈스케·겐조 형제의 치료로 목숨을 건졌다.
하기의 성밑거리(城下町). 이 작은 동네에서 明治정부의 수상·大臣·육군대장을 무더기로 배출했다. |
신임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의 조모인 시즈코(靜子)의 친정은 필자가 대절한 관광택시 운전수가 관광안내소 등 여러 곳에 문의했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시즈코의 조부는 하기 출신 육군대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이다. 淸日전쟁 당시 오시마 小將은 전시편제 混成여단의 여단장으로서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淸軍과의 牙山전투·平壤전투등지에서 싸웠다.
藩醫 아오키의 옛집. 네덜란드 의사 시볼트에게 종두법을 배운 아오키 형제는「일본 제1의 의사」로서 조슈 藩主와 明治 천황의 주치의가 되었다. |
「維新3傑」의 1人 기도 다카요시
道服 차림의 다카스기 신사쿠. 그는 柳生新陰流의 면허를 皆傳한 검술의 達人이었다. |
그가 역사의 앞무대에 등장한 것은 에도의 검객 齊藤彌九郞(사이토 야구로)의 도장에 입문해 塾頭(숙두)에 오르고 부터이다. 기도는 검술뿐만 아니라 造船術·蘭學도 배웠다.
1860년 8월, 에도灣에 정박 중이던 조슈번의 군함 丙辰丸(병진환)의 선상에서 水戶(미토)藩의 니시마루 타테와키(西丸帶刀) 등과 「丙辰丸 맹약」을 맺었다. 이 맹약은 櫻田(사쿠라다)門 사변 이후의 정국을 둘러싼 미토藩 중심의 운동에 조슈번도 海防(해방)을 통해 참획한다는 내용이었다. 1860년의 「사쿠라다門 사변」이란 천황의 재가도 받지 않고 서양 5개국과의 조약을 인준한 막부의 大老(首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를 미토藩 번사 일당이 궁문 앞에서 난도질해 암살했던 大사건이다.
1861년, 조슈번의 藩是는 나가이 우다(長井雅樂)가 제창했던 「航海遠略策」에 바탕한 公武合體策으로 결정되어 조정과 막부를 단합시키는 것이었다. 기도는 구사카 겐즈이·다카스기 신사쿠 등 요시다 쇼인 門下와 결연해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구사카 겐즈이 등 존양과격파와는 전면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던 기도는 동년 5월 京都에서 公家 및 他藩(타번)과의 절충에 나섰다.
「維新3傑」의 1人으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의 옛집. 그는 尊攘과격파와는 一線을 그은 현실정치인이었다. |
1864년 4월, 기도는 藩의 京都留守居役이 되었다. 이때 키시마(來島又兵衛)·구사카 겐즈이 등 존양과격파가 전년의 「8·18 쿠데타」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는 것을 알고 만류했지만, 실패했다. 동년 7월19일 「禁門의 變」을 일으켰다가 패전한 조슈번의 존양과격파가 京都로부터 도주하자 그도 막부의 追討를 피하기 위해 다지마(但馬)에서 잠복했다.
1865년 4월26일, 기도는 다카스기 신사쿠·이토 히로부미 등의 권유로 귀번, 對막부 전쟁에 대비해 여러 개혁을 실시하는 등 藩政의 중추에 위치하게 되었다.
기도 다카요시 옛집의 내부. |
막부 붕괴 후, 기도는 新정부의 參議(참의)에 올라 조슈번을 대표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版籍奉還(판적봉환: 각 藩이 보유해 오던 토지와 호적을 천황에게 바침)의 실현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하고,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副使로서 歐美를 시찰했다. 기도는 스승 요시다 쇼인의 영향으로 원래 征韓論者였으나 歐美를 시찰한 후에는 內治優先論者인 오쿠보 도시미치(사쓰마번 출신)와 힘을 합쳐 사이고 다카모리를 고립시켰다. 그는 1877년(明治 10년) 5월26일에 病死했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옛집에서 남쪽으로 500m 쯤 떨어진 곳에는 구사카 겐즈이(1840~1864)의 옛집이 있다. 겐즈이는 조슈번의 藩醫인 久坂良迪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슈 제1의 俊才로서 신사쿠와 함께 「쇼인 門下의 雙璧」으로 불렸지만 1864년 「禁門의 變」 당시 패전 현장에서 자결했다. 그때 그의 나이 25세. (계속)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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