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율곡의 십만양병론

yellowday 2011. 4. 12. 06:46

율곡과 강릉사투리

1582년(선조 15년) 12월 율곡은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국방의 대임을 맡아 노심초사하던 율곡은 이듬해인 1583년 2월 시급하게 해야 할 일들을 '6조계' 란 글로 써 올리면서 국방 강화를 건의하였다. 그는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먼저 준비하여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라.” 라는 옛 말을 인용하면서 여섯 조목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임현능(任賢能) :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할 것.

2. 양군민(養軍民) : 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3. 족재용(足財用) : 재용(財用)을 풍족히 할 것.

4. 고번병(固藩屛) : 번병(藩屛)78)을 견고히 할 것.

5. 비전마(備戰馬) : 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6. 명교화(明敎化) : 교화(敎化)를 밝힐 것.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조정의 반대와 신료들의 무관심 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율곡은 '6조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심사숙고한 후 이해 4월 경연석상에서 양병십만론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養兵十萬論

양병십만론

 

國勢之不振極矣    나라의 기운이 부진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국세지부진극의

不出十年當有土崩之禍    10년이 못 가서 땅이 무너지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불출십년당유토붕지화

願豫養十萬兵    원하옵건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길러서

원예양십만병

都城二萬    도성에 2만,

도성이만

各道一萬    각 도에 1만을 두되,

각도일만

復戶鍊才   그들의 세금을 덜어주고 무예를 훈련시키며

복호연재

使之分六朔遞守都城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사지분육삭체수도성

而聞變則合十萬把守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10만 명을 합쳐 지킴으로써

이문변즉합십만파수

以爲緩急之備    위급한 때의 방비를 삼으소서.

이위완급지비

否則一朝變起    이와 같이 하지 아니하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이 일어날 경우,

부즉일조변기

不免驅市民而戰    백성들을 내몰아 싸우게 하는 일을 면치 못하여

불면구시민이전

大事去矣    전쟁에 지고 말 것입니다.

대사거의

 

이 글에서 율곡은 십만의 병사를 길러야 하는 이유와 병사를 양성하는 방법, 병사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등 대비책을 실제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경우에는 전쟁에 지고 말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그러나 붕당에 휩싸인 조정에서는 이처럼 원대한 안목을 이해하고 찬성할 사람이 많지 않았다.

율곡의 개혁론에 이의를 제기하던 동인 측의 도승지 유성룡은 이번에도,

"'평화시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호랑이를 길러 우환을 남기는 것과 같다(養虎遺患: 양호유환)"

며 반대하고 나섰다.

율곡은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가며 설명을 하였지만, 다른 신하들은 율곡의 염려를 지나친 것으로 보고 마침내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율곡은 자리를 물러나와 유성룡에게,

"속유(俗儒)들은 진실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겠지만 공도 또한 이런 말을 하오?"

하면서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도리어 율곡을 향해,

"지금은 태평시대이니, 경연에서 권면(勸勉)하는 것은 마땅히 성학(聖學)을 우선으로 해야 하고, 군사의 일은 급무(急務)가 아닌데도, 공은 어떠한 소견을 가지고 계시기에 우리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이처럼 곧장 진달(陳達)을 하시었소?"

하며 따지듯 말을 하였다.

이렇게 되니 율곡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지라, 마침내 유성룡을 속유로 몰아 내심으로,

'속유가 어찌 시무(時務)를 알리오'

하고는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율곡은 십만양병론을 주장한지 2개월 후인 같은 해 1583년 6월에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임금에게 교만을 부렸다' 는 이유로 삼사의 탄핵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첫째, 북쪽의 변방에 오랑캐가 침입하여 국토변방이 유린당하고 있을 때 병마를 모집하면서 왕의 재가없이 처리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어전회의에 나가다가 어지러움병이 도져 다른 곳에 머물렀는데 이것이 교만하다는 것이다.

선조가 탄핵을 물리쳤음에도 반대파들이 강력히 주장하자 율곡은 '6소후 청죄 계'란 글을 올려 임금께 벌주기를 자청하였다. 그러면서  임금이 율곡 자신만을 아끼고 다른 높은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신하들의 입장이 곤란해진다고 하였으니, 자신의 곤란한 입장에도 상대방과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율곡의 10만 양병설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고, 조선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당하고 말았으니, 비록 선각자의 선견지명이라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쓸모도 없게 되는 것이다.

훗날 허균은 다음과 같이 그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다.

“앞으로 또한 이와 비슷한 일이 있다면 참고가 될 것이다. 전쟁을 겪은 뒤에야 조정에서는 부지런히 연마를 강구하였다. 구하여 도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이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대개 이이의 선견(先見)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밝았다. 단 몇 사람이라도 그 뜻을 헤아려 난리를 생각하고 예방하기 위한 개혁을 하였다면 역사가 바뀌고 백성들의 목숨을 그렇게 많이 잃지는 않았을 텐데…”

 

서애 유성룡은 왜란 당시 선조임금을 모시고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피난을 다니다가 왜란이 평정된 뒤에 징비록이란 책을 남겼는데, 이 책에서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일 그의 말을 시행하였다면 나라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랴! 또 그 전후의 계책을 혹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모두 척척 들어맞는다. 만일 율곡이 있으면 반드시 오늘에 맞는 일을 할 것이니 참으로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는 명백한 일이다.'

고 진술하면서 율곡의 정확한 예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하였던 것이다.

또 율곡은 생전에

"이현(而見:유성룡의 호)은 재주는 훌륭하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병통이 있어 나와 함께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고 말하며,

"우리네가 죽고 나면 그 재주를 펼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율곡이 별세 후 임진왜란 동안에 맹활약을 하였다.

유성룡 같은 분에게는 대학에 나오는 다음의 글귀가 많은 도움이 되겠다.

 

如有一介臣 斷斷  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

여유일개신 단단의 무타기 기심휴휴언 기여유용

人之有枝 若其有技 人之彦聖 其心好之不 如自其口出

인지유지 약기유기 인지언성 기심호지불시여자기구출

是能容之 以保我子孫黎民 尙亦職有利哉

시능용지 이보아자손여민 상역직유이재

人之有枝 冒疾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卑不達

인지유지 모질이오지 인지언성 이위지비불달

是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시불능용 이불능보아자손여민 역왈태재

만약에 한 신하가 있어 꾸준하고 다른 재주는 없으나,

그 마음이 너그러워서 남을 용납할 여유가 있고,

남의 재능 있는 것을 마치 자신이 그 재능을 가진 것같이 하고,

남의 현성(賢聖)한 것을 자기 마음으로 좋아하여,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여길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하다면,

이런 사람은 능히 남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리의 자손과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직을 맡아도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재능 있는 것을 질투하고 미워하며,

남의 현성한 것을 거슬려서 비하해 이해 하지 못하면,

이런 사람은 능히 남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을 가지고서는 우리 자손과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없고,

또 위태로울 것이다.

10만 양병설의 진위

이와 같은 이야기는 《율곡연보(栗谷年譜)》,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율곡행장(栗谷行狀)》, 이정구(李廷龜)가 찬술한 《율곡시장(栗谷諡狀)》,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기록이요,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시의 사관(史官)들이 거의 동인들이었으므로 그러한 사실을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율곡의 10만 양병론이 허구라는 주장도 있다.

즉,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율곡의 10만 양병론과 관련한 기사가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모두 이후의 기록으로, 오히려 서인들의 율곡 부풀리기를 위한 조작이라는 것이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에는 정파의 이해관계가 얽혀 왜곡된 부분도 있지만, 율곡이 양병론을 주장하기 이전에 벌써 '6조계'를 올려 전시대비 국방강화를 건의하면서 "자세한 내용은 반드시 직접 뵙고 상세히 말씀드리겠다"고 한 점, 또 반대파인 서애(西崖)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년 전에 별세한 율곡(栗谷)을 '진인(眞人)'이라고 추모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율곡의 10만 양병론은 사실로 보인다.

 

"우리 군의 최대약점은 <정보력 과소평가>다.

4백년 전 율곡선생이 10만 양병을 주장했던 것과 같은 심정으로 <정보군 10만 양병> 을 호소한다. "

 

(이 글은 율곡교원연수원에서 나온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yellowday 옮김